[김현수의 뉴스룸]샤넬 울리는 실리콘밸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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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 산업부 기자
김현수 산업부 기자
“한국에선 안 통할 거예요. 낮아져 봤자 7cm일걸요.”

2013년 봄, 국내 한 여성 구두 업체 직원은 잘라 말했다. 6개월 전 열린 파리 컬렉션에서는 3∼5cm 구두가 대세가 됐다. 우리는 어떨지 물었더니 ‘그럴 리 없다’는 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한국 여성들에게는 ‘킬 힐’이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예상은 빗나갔다. 킬 힐의 콧대는 순식간에 꺾였고, 낮은 굽 구두가 왕좌를 차지했다. 4년이 지난 지금도 낮은 굽 구두와 스니커즈가 인기다. 유행의 흐름은 참 신기하다.

유행은 대체 누가 만들까. 프랑스 문화 연구가 조안 드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석좌교수는 저서 ‘더 에센스 오브 스타일’에서 루이 14세(1638∼1715) 시대에 답이 있다고 했다. 재단사에게 옷을 맞춰 입던 프랑스 귀부인들이 1670년대부터 베르사유에 모여 매 시즌 입을 옷의 색깔과 리본 모양 등을 정했다고 한다. 서로 논의해 비슷하게 옷을 입으면서 유행, 트렌드의 개념이 싹텄다. 당시 영민한 프랑스 마케터는 베르사유 스타일 옷을 입은 인형과 판화를 만들어 해외 시장에 뿌렸고, 패션 명품은 산업화되기 시작했다. 유행의 전제조건인 모방 욕구를 자극한 것이다.

트렌드 세터가 유행을 제시하고 기업이 마케팅을 통해 이를 대중화하는 공식은 현대에도 유효하다. 샤넬, 루이뷔통 등 이른바 ‘명품’ 브랜드의 부상에는 전통 있는 유럽 패션에 대한 선망이 깔려 있다. 미국과 아시아 소비자 덕분에 명품 시장은 20여 년 동안 2008, 2009년 금융위기를 제외하고는 매년 고성장을 기록했다.

성장에 제동이 걸린 것은 2014년 무렵이다. 글로벌 경영 컨설팅업체 베인앤드컴퍼니에 따르면 글로벌 명품 시장 성장률은 2014∼2016년 각각 3%, 1%, 0%로 나타났다. 확연한 저성장이다. 반면 여행, 외식 등 럭셔리 경험 산업의 지난해 성장률은 명품보다 5%포인트 높았다. 베인앤드컴퍼니는 “럭셔리 소비는 물건에서 경험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도 글로벌 시장과 양상이 비슷하다. 옷은 그렇게 안 사도 여행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5월 황금연휴에 100만 명이 해외여행을 떠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제 여행이 유행이 됐다.

한 명품 시장 전문가는 이를 두고 “실리콘밸리가 트렌드 세터가 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글로벌 시가총액 3대 기업은 애플, 알파벳(구글 지주회사), 마이크로소프트다. 부(富)가 정보기술(IT) 업계에서 나온다. IT 부자들이 선망의 대상이 됐고,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이 패션 유행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2000년대 미국 월가가 잘나갈 때에는 이들이 입는 명품 슈트가 인기였다. 이제는 후드 티를 입고 슬리퍼를 신은 실리콘밸리 스타일이 대중의 눈에 더 멋져 보인다. 이들은 후줄근해 보여도 철학과 취향에 맞는 소비를 한다.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고 온라인으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대중에게 직접 알린다.

라이프스타일, 즉 무형 상품이 유행이 되면서 유통, 패션, 명품 업체들은 ‘멘붕’ 상태다. 명품 가방보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는 게 더 멋져 보이다니. 유행의 흐름은 참 신기하다.
 
김현수 산업부 기자 kimhs@donga.com
#실리콘밸리#샤넬#더 에센스 오브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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