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권순활]대구 서문시장의 눈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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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직후인 1601년 대구에 관찰사가 상주하는 경상감영이 설치됐다. 대구가 영남지방의 행정 중심지로 탈바꿈하면서 경제활동도 활발해졌다. 재래시장은 당초 대구성(城)의 북문 밖에 있었으나 숙종 때인 1679년 경상감영의 서문 밖으로 옮겨가면서 서문시장이란 이름을 얻었다. 서문시장은 조선 후기 평양장, 강경장과 함께 조선의 3대 시장으로 꼽혔다.

 ▷1919년 3·1운동 때 서문시장 상인들이 대거 참여하자 일제는 1922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 현재의 위치로 시장을 옮겼다. 이전 직후 한때 기세가 꺾였던 서문시장은 곧 활기를 되찾았다. 광복 후에는 대구의 직물 및 섬유산업을 기반으로 포목 도소매와 철물 도매 분야에서 전국 최대 시장으로 자리를 잡았다. 올해 6월 문을 연 상설 야시장이 인기를 끌면서 서문시장은 ‘밤이 즐거운 대구 야행(夜行)’의 중심지로 뜨고 있었다.

 ▷서문시장은 광복 이후 2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화마(火魔)에 여섯 번이나 시달렸다. 그러나 시련이 닥칠 때마다 상인들은 오뚝이처럼 일어났고 영남권 최대 재래시장답게 다시 번창했다. 2005년 12월 29일 한밤중에 불이 나 1190여 개 점포를 태웠을 때는 “설 제수용품은 모두 서문시장에서 사자”며 대구 사람들이 달구벌을 뜨겁게 달궜을 정도다. 상인이 2만 명이 넘는 서문시장은 대선 때마다 여야 후보들이 반드시 찾는 ‘영남권 현장정치의 1번지’였다.

 ▷박근혜 대통령도 중요한 정치적 고비 때마다 서문시장을 방문해 열렬한 지지를 확인했다. 작년 9월엔 ‘배신의 정치인’ 유승민 의원 등 대구가 지역구인 의원들을 동반하지 않는 것으로 ‘메시지’를 발신하기도 했다. 지난달 30일 발생한 대형 화재로 시름에 잠긴 이곳을 어제 박 대통령이 찾았다. “현재 상황에서 여기 오는 것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지만 찾아뵙는 것이 인간적인 도리라고 생각해 오게 됐다. 미안하다”는 말에 진심이 담겨있다고 나는 받아들인다. 다만 상인들 사이에 안타까움 못지않게 차가운 반응도 적지 않았다는 것은 예전과 달라진 양상이었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임진왜란#서문시장#대구#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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