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기관과 조정해결 ‘좁은문’… 비용부담에 소송 대부분 포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9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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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사고, 피해자들만 발동동]‘신해철’ 영향 의료사고 조정신청↑
2015년 중재원 신청 1064건… 3년새 4배
의료기관 중재거부 2014년 46%
‘강제조정’ 의료분쟁법 2014년 발의… 의료계 “무분별 요구 급증할것” 반발

검찰이 고 신해철의 사인을 ‘의료인 과실’로 결론내릴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근거는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중재원)이 진행한 감정 결과였다. 중재원은 일반 의료사고 피해자들이 신청하는 사건을 중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경찰 검찰 등 사정기관이 의학적 자문을 할 경우 수탁감정도 진행하고 있다.

○ 의료분쟁 10건 중 7건은 시작도 못 해


신해철 사건의 여파로 국가 기관인 중재원을 통해 의료분쟁을 해결하려는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올해 7월까지 중재원에 의료사고 조정을 신청한 건수는 1064건으로, 2012년 같은 기간에 비해 약 4배 늘었다. 올해 7월 현재 사정기관이 감정을 맡긴 건수도 244건으로 지난해 총건수(226건)를 이미 넘어섰다.

하지만 실제로 분쟁 조정에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환자가 중재원에 중재를 신청해도 의료기관이 거부할 경우 조정이 시작조차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비자 피해구제, 환경분쟁 조정, 개인정보분쟁 조정, 건설분쟁 조정, 언론중재 등 다른 분쟁 해결 기구들이 피해자가 조정을 신청하면 자동적으로 중재가 시작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병원이 법적으로 중재에 응할 의무가 없다 보니 중재 거부율은 2012년 38%에서 지난해 45.6%까지 늘어났다. 법무팀을 갖춘 대형 종합병원들은 거부율이 71.5%에 이른다.

○ 중재 거부당하면 사실상 포기

의료기관이 묵묵부답이고, 중재원을 통한 조정까지 거부당할 경우 피해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는 민사소송이다. 하지만 1심까지 2년 이상 소요되는 민사소송은 비용이 약 1000만 원이 든다. 민사소송은 의료인 과실을 의료사고 피해자가 직접 증명해야 하기 때문에 승소 가능성도 낮다. 그뿐만 아니라 패소할 경우 소송에 따른 보상금까지 부담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민사소송에서 피해보상액을 1억 원가량 내걸었다 패소하면 약 500만 원을 보상금으로 내야 한다.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 대표는 “의료사고는 한 가정을 파탄으로 내몰 정도로 서민들에게 큰 위협이다”라며 “하지만 중재원에서 조정을 거부당한 피해자 대부분은 사실상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의료분쟁이 발생할 경우 의료기관이 의무적으로 중재에 참여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온다. 오제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강제조정 내용을 담은 의료분쟁법안(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안)을 지난해 4월 발의했다. 이 법안은 신해철 사건 이후 ‘신해철법안’으로 불리며 재조명받았지만 의료계의 반발 속에 국회 계류 중이다. 정진엽 신임 보건복지부 장관도 인사청문회에서 “의료사고 분쟁 조정을 의료기관이 동의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개시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 “의료분쟁 조정 강제 참여 땐 소신 진료 못해”

의료계는 중재원에 접수된 모든 사건에 대해 국가가 의료기관에 분쟁 조정 참여를 강요할 수는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무분별한 분쟁 조정 신청이 늘어날 경우 소신 진료가 어렵고 의료사고를 우려한 의사들이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진료에 치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필수 대한병원협회 법제의사는 “조정 신청 수와 개시 건수는 늘고 있지만, 조정이 실제 원만하게 풀리는 경우는 많지 않다”며 “단순 부작용인지, 진짜 의료사고인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의료인이 분쟁에 휘말리면 정상적인 진료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의료분쟁 조정에 참여하는 것이 병원에 이득이 되는 면도 있다고 지적한다. 중재원이 환자들의 과잉 의료분쟁 신청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사각턱 수술을 받고 중이염이 심해져 고막절제술을 받은 40대 러시아 여성이 병원 측에 1억 원의 피해 배상을 요구했지만 중재원은 “중이염과 해당 시술은 직접적 연관이 없지만 러시아 통역 등 사전 설명이 부족했다”며 300만 원 배상을 중재한 바 있다.

이민호 중재원 상임감정위원(한양대 명예교수)은 “의료사고를 중재하는 국가 기관은 환자와 병원 그 누구를 위한 조직도 아니다”라며 “사망 사고, 중증 질환자의 사례부터라도 강제 중재 개시를 도입해 합리적인 중재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대한성형외과의사회와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은 5일 서울 이화삼성교육문화관에서 ‘의료사고 예방대책 토론회’를 열고 이 같은 의료분쟁 해결 방안을 모색할 예정이다.

유근형 기자 noe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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