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영식]행정가의 길, 리더의 길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6일 03시 00분


코멘트
김영식 정치부 차장
김영식 정치부 차장
2001년 8월에 열린 평양 ‘8·15 민족통일대축전’은 한국 사회와 남북관계에 상처만 남긴 행사였다. 남측 대표단의 일부였지만 통일연대가 평양의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 행사 참가를 주도하고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가 김일성 주석의 생가인 만경대의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문구를 남기면서 파장은 커졌다. 이는 임동원 당시 통일부 장관 해임으로 이어졌다.

정작 개인적으로 눈길이 간 부분은 이런 큰일이 터지고 난 이후의 처리 과정이었다. 범민련 등 진보진영 인사가 대거 포함된 대표단의 방북을 승인한 과정을 두고 대대적인 조사가 벌어졌다. 통일부 실무자는 지겹도록 이어지는 조사에 파김치가 됐다. 하지만 당시 방북단에 급진적인 진보진영 인사를 상당수 포함해도 된다고 결정한 것은 실무자가 아니었다. 그건 햇볕정책을 내세웠던 당시 정권 차원의 결정이었다. 그 실무자는 당시 “주제넘게 제가 먼저 승인했다면 저는 옷을 벗어야 했을 겁니다”라고 했다.

그의 말을 듣고 공무원들의 모습을 다시 생각해 봤다. 행정가로 불리는 공무원들의 결정과 승인 과정에는 이런 동물적인 생존본능이 있는 것일까. 당시 행사는 과거 유사 사례를 찾기 어려운 다른 방식의 것이었다. 공무원들은 이런 변화를 부담스러워한다. 승인했다가 잘못된 결과로 이어지면 그 책임을 뒤집어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책을 집행하는 행정가들은 기존의 틀을 벗어나는 것을 싫어한다. 안정적인 것을 선호한다는 뜻이지만, 이를 달리 말하면 복지부동이다. 행정가들에게 새로운 전략이나 새로운 정책을 만들어 내라고 하는 게 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이런 행정가들을 활용하는 큰 그림을 만들어 내고, 이들을 설득하는 힘이 바로 리더십인 것이다.

북한의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기는 어렵지만 이런 행정가들의 태도가 북한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북한의 대남 일꾼들은 더 빡빡한 환경에 처했을 가능성이 크다. 문제가 생긴다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면 되는 남쪽과는 달리 북에선 생사의 문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북측 대남 일꾼들이 결과를 장담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남북관계 개선 얘기를 상부에 직언할 수 있을까. 결국 최고 권력자인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의 결정이 북한 정책의 변화를 이끄는 유일한 길인 셈이다.

이희호 여사의 방북이 주목받는 것도 김정은과의 면담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면담 성사 가능성을 두고 갖가지 관측이 나오지만 그리 어렵게 생각할 일도 아니다. 김정은의 초청으로 방북했으니 만나는 게 당연한 일이 돼야 한다. 이는 북한으로서는 현영철 전 인민무력부장 처형 등으로 인한 공포통치의 이미지를 벗는 기회일 수도 있다. 하지만 93세의 고령인 이 여사가 땡볕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줄 털목도리를 갖고 어려운 길을 찾아 나섰는데 정작 초청자를 만나지도 못한다면 북한은 국제적인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초청 안 하니만 못한 일이 된다는 얘기다.

남북관계를 얘기할 때 화해, 개선, 훈풍 등 긍정적인 단어들도 쓰지만 악화, 경색, 냉각 등의 부정적 단어들도 사용한다. 그동안 부정적인 단어들이 많이 쓰였다. 당장 긍정적인 기류로 급격한 반전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이젠 방향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임박한 광복절 70주년을 두고 갑자기 남북이 거창한 행사를 치르기를 원해서는 아니다. 적어도 광복 80주년에는 달라진 남북관계를 만들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다. 물론 이를 가능하게 만들 주요 행위자의 한 축은 북한 행정가가 아니라 리더일 것이다.

김영식 정치부 차장 spear@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