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부형권]한국을 싫어할 수 없어서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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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형권 뉴욕 특파원
부형권 뉴욕 특파원
“네가 이 아빠보다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는 방법은 공부밖에 없어.”

20대 후반의 직장 여성 J 씨는 이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 아빠 말대로 열심히 공부했고 번듯한 4년제 대학을 졸업했다. 그러나 J 씨는 요즘 ‘대학에서 돈과 시간만 낭비한 것 같다’는 회의감에 빠져 있다. 그가 구할 수 있는 일자리들은 전공(행정학)과 상관없고, 월급도 적다. 내 집 마련을 위한 저축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빠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아빠를 모실 능력이 없는 J 씨는 결국 ‘다세대 주택’으로 이주하기로 했다. 할머니 집으로 살림을 합쳐 삼대(三代)가 같이 사는 다세대 주택(a multi-generational housing unit)이다.

J 씨는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 나아가 친구와 집(장만)도 포기한 ‘오포세대’로 불리는 한국의 암울한 2030세대를 상징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J 씨는 미국 사람이다. 공화당 유력 대선주자 마코 루비오 상원의원(44·플로리다 주)이 자서전(아메리칸 드림스·American Dreams)과 강연 등에서 소개한 제니퍼(Jennifer) 씨 이야기다. 루비오 의원은 ‘아메리칸 드림’을 ‘아이들이 그 부모보다 더 잘사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쿠바 이민자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술집 바텐더와 가사도우미를 하며 날 키웠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 다닐 때 일부러 주말 심야 근무를 자원하며 악착같이 돈을 버셨다. 나에겐 ‘아르바이트하며 시간 뺏기지 말고 오로지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루비오 의원은 “내 부모와 내가 누린 아메리칸 드림을 21세기에도, 제니퍼 씨도 누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다른 대선주자들도 비슷하다. 그의 어머니뻘인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68)도 아메리칸 드림의 재건을 외친다. 보수냐 진보냐, 작은 정부론이냐, 큰 정부론이냐 하는 이념적 방법론적 차이만 있을 뿐이다. 결국 2016년 미 대선은 ‘젊은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잘사는 미국’을 만들 적임자를 뽑는다는 얘기다.

여론조사전문기관 퓨리서치센터에 따르면 ‘지금의 아이들이 부모 세대보다 못살 것 같다’는 걱정은 선진국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다. 독일 58%, 미국 60%, 호주 64%, 영국 68%, 일본 72%, 프랑스 85%가 그렇게 우려했다. 한국도 ‘더 잘살 것’(43%)보다 ‘더 못살 것’(52%)이란 대답이 많았다.

회사(동아일보) 동료였던 장강명 작가(40)의 장편소설 ‘한국이 싫어서’가 인기를 끌고, ‘지옥 같은 한국’이란 뜻의 ‘헬조선(hell+朝鮮)’이란 신조어가 생겨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부모보다 더 잘살 희망이 안 보이는 나라를 좋아할 수 있을까 싶긴 하다. 그러나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되면 가장 두려운 건 ‘내 부모보다 못사는 것’이 아니라 ‘내 부모 같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다. 부모가 돼서 보니 내 아버지 어머니, 대한민국 부모들이 ‘한강의 기적’이란 걸 깨닫는다. 집안에 돈 나오는 요술 항아리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떻게 늘 “돈 걱정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하셨을까. 루비오 의원은 “아메리칸 드림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들의 노력으로 지켜져 왔다. 그 꿈을 이어가는 건 우리 세대의 몫”이라고 말했다. 동의한다.

내 부모 세대에게서 받은 은혜를 자녀 세대에 갚아야 한다.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히 노력하면 성공하는 ‘코리안 드림’을 이어가는 데 작은 기여라도 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단한 애국자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한국을 싫어할 순 없다.

부형권 뉴욕 특파원 bookum90@donga.com
#루비오#아메리칸 드림#제니퍼#한국이 싫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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