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베극인]롯데를 보는 재일교포들의 시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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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극인 도쿄 특파원
배극인 도쿄 특파원
주일 한국대사관이 있는 도쿄 미나토 구 미나미아자부 일대는 일본 왕실 친인척과 권력 실세들이 모여 살았던 일급지다. 고급 주택지 한가운데 1만 m²가 넘는 널따란 대지를 확보하고 지상 7층 규모로 세워진 대사관은 당당해진 한국의 위상을 상징하는 듯해 볼 때마다 뿌듯하다.

이 땅의 원래 주인은 방적회사를 만들어 성공한 재일교포 1세 사업가 서갑호 씨였다. 1952년 땅을 사들였던 그는 10년 후 1962년 광복절 기념식 재일교포 참관단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해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만나고 난 뒤 이 땅을 대사관 부지로 기증할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전까지 주일 한국대표부(1949년 1월 개설)는 유랑 신세였다. 운영비는커녕 임차료도 지원받지 못했다. 이런 대표부를 지원했던 것도 재일교포들이었다. 코오롱그룹 창업자 이원만 씨는 본인 소유의 마루노우치 1번지 벽돌 건물을 빌려주기도 했었다.

서갑호 씨의 땅 기증 이후 일본 전역에서 공관 건설을 위한 기증과 모금 운동이 본격화됐다. 1970년대까지 오사카, 나고야, 고베, 후쿠오카 등 일본 전역의 9개 총영사관이 재일교포들의 손으로 세워졌다. 비슷한 시기 재일교포들은 ‘조국 근대화’를 내건 박정희 정권의 호소에 적극 호응해 한국 투자에 나섰다. 한국은 박 의장이 정권을 잡은 1961년 국민소득이 82달러였다. 국가 신용이 없어 외국 투자를 끌어오려 해도 돈을 빌려주는 나라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 자본을 유치하고 선진 기술과 경영 노하우를 도입할 유일한 통로는 재일교포라는 게 박 정권의 생각이었다. 1965년 일본과 국교를 수립하자마자 실천에 나섰다. 1967년 4월 1일 대한민국 최초의 수출산업공업단지로 문을 연 ‘구로공단’이 그 상징이다. 28개 입주기업 가운데 18개가 재일교포 투자기업으로 전기 전자 화학 비료 섬유 금속 등 한국에 없던 산업들이 처음 들어왔다. 구로공단 창립 주역이 된 재일교포들은 ‘경북 구미공단’ ‘마산 수출자유구역’ ‘안산 반월공단’에도 속속 진출해 일본의 선진 기술을 한국에 이식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롯데 역시 박 정권의 요청으로 1966년 롯데알미늄으로 한국에 첫발을 들였다. 이후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협력업체까지 합쳐 한국에서 35만 명의 일자리를 만든 굴지의 기업으로 컸다. 일본 땅에서 역경과 차별을 견디며 살아온 교포들은 이런 롯데를 자긍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요즘 많은 교포들의 심정은 착잡하고 복잡하다. 일본에서는 롯데 사태가 한국 재벌의 후진적인 경영 행태로 일반화돼 도마 위에 오르는가 하면 한일 양국에서 서로 “일본기업이다”, “한국기업이다”며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악화된 한일감정이 이번 사태를 증폭시키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재일교포 3세는 “예컨대 신격호 총괄회장 일가의 일본식 이름이나 일본어 사용은 재일교포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며 “신 회장 일가가 미국식 이름과 영어를 쓰는 재미교포라면 상황이 달랐을 것 아니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롯데 비판을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로 연결하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그만큼 재일교포들이 롯데 사태를 남의 일같이 여기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무슨 일이든 위기 속에는 ‘기회’라는 반전이 있기 마련이다. 롯데가 초심으로 돌아가 하루빨리 후계 분쟁을 정리하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걸맞은 투명경영으로 거듭나는 것만이 교포들의 자긍심을 일으켜 세우는 길이라 생각된다.

배극인 도쿄 특파원 bae2150@donga.com
#롯데#재일교포#주일 한국대사관#서갑호#구로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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