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M기 현금 동나고…기름-식료품 사재기…‘폭풍 전야’ 그리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9일 17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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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폴트(채무불이행)를 눈앞에 둔 그리스에는 마치 ‘폭풍 전야’처럼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뉴욕타임스(NYT), 가디언 등은 28일 “약탈 집회 등 소요사태는 없지만 암울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소리 없이 번지고 있다”고 전했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구제금융 협상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표한 직후인 27일 새벽까지만 해도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앞에 길게 늘어서있던 줄도 이튿날 아침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는 ATM에 현금이 동난 데다 은행에서 이를 다시 채워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한 은행 관계자는 “전국 7000여 개의 ATM 가운데 500여 개에서 현금이 모두 인출됐다”고 말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ATM 스크린에는 ‘기술적 결함’이라는 문구만 깜빡거렸다고 NYT가 전했다.

하지만 28일 저녁 치프라스 총리가 “국민투표가 끝나는 7월 6일까지 은행 문을 열지 않겠다”고 발표하자 시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뱅크런 사태에 따른 혼잡을 피하기 위해 29일 자정부터 계좌당 하루 60유로(약 7만5000원)이상을 인출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이 기간 동안 신용카드와 직불카드를 사용하고 인터넷뱅킹을 이용하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해외 송금도 제한됐다. 증시도 29일 휴장키로 했다.

시민들은 다시 그리스 국영은행 ATM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미 다른 민영은행들 의 현금이 동난 곳이 많아 그나마 지급여력이 있는 국영 은행으로 몰린 것이다. 국영은행 ATM 앞에는 50명 이상씩 대기하며 긴 줄이 늘어섰다. 아테네 남쪽 교외의 한 ATM 앞에서 줄을 서 있던 마리아 폴리메니우 씨는 “은행 문을 닫는 기간이 처음엔 하루라고 했다가 일주일로 늘어나는 등 상황이 매시간 바뀌고 있다”며 “사람들이 매우 불안해하고 있다”고 가디언에 전했다.

NYT는 기름과 식료품을 사재기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현지 상황을 전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시민들의 혼란을 부추기는 소요 사태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것. 그리스 정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은행 주변 경찰 순찰을 늘렸고 방탄조끼까지 지급한 상태이다.

외신들은 그리스 시민들이 촉각을 곤두세우며 TV뉴스를 지켜보고 있다고 전했다. 많은 사람들이 일요일 새벽까지 TV 생중계로 방영되는 의회 토론을 시청했고 삼삼오오 모여 의견을 주고받고 있다. 아테네의 한 카페에서 친구들과 토론을 벌이던 퇴직자 알레코스 니카스 씨는 “유럽채권단이 제시한 협상안을 받아들이면 연금이 깎인다고 하더라. 치프라스 총리가 이를 거부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NYT에 전했다. 반면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에 대해선 우려를 나타냈다. 니카스 씨의 친구 바실리스 팡겔리디스 씨는 “(유로존을 떠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이라며 “음식도 연료도 없는 베네수엘라와 같은 처지가 될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치프라스 총리가 국민투표를 제안한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에라토 스피로풀루스 씨는 “왜 이런 사안에 대해 국민투표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이것은 그리스의 관(棺)에 마지막 못을 박는 행위”라고 블룸버그통신에 전했다.

그리스의 미래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도 엇갈리고 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은 28일 NYT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내가 그리스 국민이라면 협상안에 반대표를 던질 것이다. 채권단이 그리스에 혹독한 긴축과 개혁을 무기한으로 요구하고 있다”며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해도 지금보다 극심한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은 낮다”고 했다.

반면 유명 투자전문가인 짐 로저스 로저스홀딩스 회장은 “디폴트를 하도록 놔둔 뒤 스스로 다시 일어서게 하는 것이 이번 사태의 해법”이라고 했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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