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이병기 실장, “안 된다” 말하고 사표 내시라

김순덕 논설실장 입력 2015-06-28 21:53수정 2015-06-29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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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메시지 담당 ‘문고리 권력’
후폭풍 가늠할 능력 의지 없으면 나라에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소통 자임했던 대통령비서실장, ‘청와대 왕따’ 풍문 사실인가
“유승민 원내대표 불러 대화를”… 職을 걸고 진언할 公僕 없나
현지시각 4월 20일 오후 페루 리마에 있는 한 호텔에서 열린 한-페루 비즈니스 포럼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이 정호성 비서관으로부터 귀엣말을 듣고 있다. 동아일보 DB

김순덕 논설실장
정호성 청와대부속비서관의 귀엣말에 귀를 쫑긋 세운 듯한 박근혜 대통령. 4월 21일자 이 한 컷만큼 의미심장한 대통령 사진도 없다.

성완종 리스트에 연루된 이완구 국무총리가 중남미 순방 중인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한 다음 날이었다. 청와대 ‘문고리 3인방’ 중 하나인 정호성의 긴급보고 사진과 함께 나온 대통령 메시지가 “검찰은 정치개혁 차원에서 수사하라”와 “매우 안타깝고 총리의 고뇌를 느낀다”는 소회였다. 총리의 고뇌? 국민의 분노는 어쩌고?

대통령이 16분 발언 중 12분간 ‘배신의 정치’에 대해 맹폭격한 지난주,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누구냐” 물었다. 정치권 전체와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까지 공개적으로 질타할 필요가 있다고 누가 직언했는지, “아니 되옵니다” 말리지는 않았는지, 아무도 어쩌지 못했다면 “돌아온 것은 정치적, 도덕적 공허함만이 남았다”는 어법도 틀린 원고를 누가 썼는지 궁금해했다. 사전에 누구와도 협의하지 않았다는 보도가 믿기지 않아서다.

대통령 메시지 담당 비서관이 정호성이다. 청와대수석들도 놀라게 한 문제의 원고는 대통령이 직접 썼지만 정호성이 자료 수집을 도왔다는 뉴스에 나는 그 사진을 떠올렸다. 2012년 대통령선거 직전 정수장학회 논란이 일었을 때 당시 박 후보에게 정수장학회의 정당성을 강조한 원고를 써준 사람도 정호성이라는 게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의 전언이다. 안대희 정치쇄신위원장이 과거사 사과 메시지를 전했는데도 후보는 엉뚱한 쪽지를 읽어 선거캠프가 발칵 뒤집혔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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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귀를 붙들 수 있는 막강 파워맨에게 대통령 발언이 가져올 결과를 다각도로 예상 분석하고 수위를 조정할 실력도, 의지도 없다면 심각하다. 대통령은 ‘일개 심부름꾼’으로 여기지만 국민한테는 나라의 명운이 걸린 문제일 수 있다. 경륜과 식견을 갖춘 수석들을 놔두고 초선의원 시절 비서에 의지하는 건 어른이 우유병에 매달리는 것과 다름없다. 리더의 궁극적 책임은 사람들을 리드해 목표를 이루는 것이지 도덕적 심판도 아니다. “대통령으로서 국민이 준 권한과 의무를 국민을 위하는 길에만 쓸 것”이라더니 이런 인력 낭비, 세금 낭비가 없다.

더구나 정호성은 청와대 문건 사태 때 “배후에 김무성 유승민이 있다”고 했다는 ‘십상시’ 음종환 행정관과 대학 동기이기도 하다. 실체 없는 사건으로 밝혀졌지만 참모의 참모까지 집권당 지도부를 음모론 시각으로 보는 태도가 대통령에게 영향을 미치지 말란 법도 없다.

이럴 때 나서야 할 사람이 넉 달 전 ‘소통(疏通)병기’로 취임한 이병기 비서실장이다. 군 출신 노태우 대통령 밑에서도 “각하, 김근태는 빨갱이가 아닙니다”라고 직언한 경력이 있어 박 대통령한테도 진언할 만한 인사라며 야당에서도 반색을 했다. 그가 국정원장 때 간부 인사에 개입했던 3인방 중 한 사람을 질책했다는 후문이 돌면서 “문고리 권력 임자 만났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지금처럼 당청 간이 살벌하고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이 실장은 설령 대통령의 레이저를 맞더라도 할 말을 해야 한다. “국민이 불안해하고 있다. 대통령의 개혁과제를 위해서도 국회 협조는 꼭 필요하다. 유승민을 청와대로 불러 ‘잘해보자’고 하는 것이 큰 정치”라고 말할 사람이 이 실장 말고는 보이지도 않는다. 이제는 대통령이 웃어도 무섭다는 민심을 전할 사람도 이 실장뿐이다.

그런데 그가 청와대 왕따라는 말을 풍문으로 들었다. 제1, 2부속실 역할을 다 맡은 정호성은 문건 사태 전보다 막강해졌고 이 실장은 대통령과 독대도 못 한다는 믿을 수 없는 얘기도 나돈다. 정호성이 아는 대통령의 ‘생얼’과 정보를 이 실장은 알지 못해 김무성 대표와 함께 신세 한탄하는 처지라는 거다.

청와대에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라면 왜 죽음을 각오하지 않는지 묻고 싶다. 어차피 사표 낼 각오면 명색이 비서실장이 대통령에게 “이제는 3인방을 내보내야 한다”고 왜 말 못 하는지, 내가 내는 세금이 아깝다. 정호성을 거쳐야 하는 서면보고 말고 장관 수석의 대면보고를 받으면 세상이 달리 보일 거라는 진언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몇 달 쉬고 또 비굴한 벼슬을 할 욕심이 아니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건 안 된다”고 할 말을 하는 공복(公僕)이 박근혜 정부에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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