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문병기]낙하산 지나간 자리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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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기 경제부 기자
문병기 경제부 기자
“공무원 집에서는 개가 짖는 것도 잘 단속해야 해요.”

얼마 전 만난 한 고위 관료의 말이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모처럼 한가로운 주말을 맞아 개를 산책시키기 위해 집을 나선 이 관료는 엘리베이터에서 이웃 주민을 만났다. 그런데 무엇 때문인지 개가 이 이웃을 보고 성난 듯이 짖었다. 당황한 이웃에게 사과를 하고 산책을 다녀온 이 관료는 금세 이 일을 잊었다.

며칠 뒤 퇴근하고 돌아온 그에게 아내는 속상한 표정으로 “얼마 전 ○○○호 사람을 본 적 있느냐”고 물었다. 이웃들 사이에 “고위 관료 집이라서 그런지 개도 콧대가 높다”는 뒷말이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관료는 “개가 짖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며 “요즘 사회적 분위기를 보면 관료는 죄인”이라며 씁쓸해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공직사회를 보는 일반의 시각은 무척 차가워졌다. 퇴직 관료들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공공기관과 유관협회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형성된 민관유착이 세월호 참사로 이어졌다는 소위 ‘관피아’에 대한 비판이 나오면서다.

낙하산 인사에 대한 비판이 두려워서일까. 여러 공공기관의 기관장 자리가 오랫동안 비어 있는데도 좀처럼 인사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현재 기관장이 공석인 공공기관은 모두 29곳. 이 중에는 벌써 9개월가량 기관장이 임명되지 못한 공공기관도 있다.

공공기관장 인사가 늦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한 정부 고위 관계자는 “낙하산 인사를 하지 않으려다 보니 생기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내 공공기관장 연봉은 일반적으로 비슷한 분야 민간기업 경영자의 절반 수준이어서 민간에서 능력이 검증된 인물은 공공기관장에 별 관심이 없다”며 “이런 상황에서 퇴직 관료를 배제하고 나니 적임자를 찾기가 무척 어려워진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낙하산 인사 관행을 없애려다 보니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속출해 제때 기관장을 임명하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지원자들의 자질과 도덕성을 검증하는 일도 새로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정부가 사실상 몇몇 인사를 후보군으로 두고 형식적인 공모절차를 밟을 때는 유력한 소수 후보자의 자질과 도덕성만 검증하면 돼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하지만 제로베이스에서 공모제를 시행하면 민간인들로 구성된 기관별 임원추천위원회가 수많은 지원자를 자체적으로 검증해 적절한 후보군을 가려내야 한다. 공공기관장에 오른 인물이 뒤늦게 추문에 휩싸이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이렇다 보니 일각에서는 미국처럼 한국도 공공성이 큰 주요 공공기관장을 뽑을 때는 공모제가 아닌 임명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또 기획재정부 산하의 공공기관운영위원회를 공공기관 인사 업무를 전담하는 독립 행정기구로 분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낙하산 인사가 공공기관장이 되면서 노조와 갈등을 빚거나 임기도 못 채우고 잘리는 등의 ‘최고경영자(CEO) 리스크’를 공공기관이 매번 떠안는 것은 경제활성화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10여 년간 계속된 ‘무늬만 공모제’와 공공기관 인사 때마다 불거지는 소모적인 논쟁을 종식시킬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문병기 경제부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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