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청와대가 시진핑에게 당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6일 2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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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확대 우려”
한중정상 비공식 대화 돌연 공개…한미일 공조 깨는 중국 작전인가
서울대에선 “자주적 평화통일”…북한의 반미투쟁 통일방식 지지
국민은 중국을 아직 못 믿는데 대통령은 너무 앞서가고 있다

김순덕 논설실장
김순덕 논설실장
기이한 일이다. 분명 뒤통수에 혹이 났는데 맞는 쪽은 “아야” 소리도 없이 웃기만 하고, 때린 쪽 역시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 시침 뚝 떼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 후폭풍을 두고 하는 소리다. 시진핑은 방한 둘째 날인 4일 오전 서울대 강연에서 작심한 듯 일본을 비판했다. 시진핑 출국 직전인 오후 5시엔 주철기 대통령외교안보수석이 느닷없이 “두 정상은 어제와 오늘 일본 문제에 대해 많은 토의를 했다”며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와 집단적 자위권 확대에 ‘우려’했다고 뒤늦게 전했다.

정상 간에 비공식적으로 오간 얘기는 밝히지 않는 게 외교적 관례다. 제3국을 비판하는 내용이면 더욱 그렇다. 그날 오후 2시만 해도 외교부 조태용 제1차관이 방송에 나와 “정상회담에서 일본에 대해 얘기가 나왔더라도 밖으로 꺼내놓고 공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활동 공간을 제약하는 측면이 있다”고 알려줬다. 그 뒤 3시간도 안 돼 바람직하지도 않고 우리 외교를 제약하는 측면이 드러난 것이다.

나는 청와대가 시진핑에게 ‘당했다’고 본다. ‘신형대국관계’라는 미국과 대등한 관계를 추구하며 일본과는 영토 다툼까지 벌이는 중국으로선 우리가 자국 편에 섰음을 만방에 과시해야 했다. 그런데 정상회담 때 실컷 한 얘기를 한국은 공동성명에 담지 말자니, 기자회견장의 시진핑은 미소는커녕 잔뜩 화가 난 모습이었다.

중국은 그대로 있지 않았다. 일본에 대한 우리의 국민감정을 모를 리 없는 시진핑은 언론이 보도하지 않을 수 없는 서울대 연설을 택해 ‘양국 국민이 적개심을 품고 전쟁터로 가자’는 양 임진왜란을 거론했다. 자칫 한미일 공조는 물론이고 한미동맹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말 폭탄’이다. 그럼에도 일본에 맞서지 못하는 나라로 찍히기 싫은 정부는 대일(對日) 한중 공조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진보좌파 성향의 경향신문이 “박근혜 정부가 국내정치적 인기를 위해 외교를 희생시킨 또 하나의 사례로 기록될 것”이라고 적었겠나.

비공식 대화가 그렇게 많이 오갔다면, 한중 정상이 합의했다는 ‘한반도 비핵화’도 정부 발표를 믿을 수 있는지 의문이다. 박 대통령은 “북한의 비핵화를 반드시 실현하고 핵실험에 결연히 반대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반도 비핵화에는 우리의 핵개발 반대는 물론이고 주한미군 철수와 미국이 보장하는 핵우산 금지도 포함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유사시 미국 전술핵 재배치나 미사일방어(MD) 체제 건설도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공동성명엔 ‘한반도 평화통일’이라고 나왔지만 시진핑이 서울대에서 발언한 ‘자주적 평화통일 지지’도 위험하다. 주사파인 운동권 민족해방(NL) 계열에서 미국을 주적(主敵)으로 규정하고 반미투쟁과 ‘우리 민족끼리’를 주장하며 내세운 통일 방식이 바로 자주적 통일이어서다. 이른바 친북 인터넷매체로 꼽히는 자주민보는 “북이 주장하는 통일론과 같은 것”이라고 친절히 설명했다.

결국 이번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대인 같은 풍모와 아름다운 아내의 ‘매력 공세’를 통해 북한의 주장을 관철하는 개가를 올렸다는 얘기다. 누리꾼 사이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도 못했던 친중(親中)정책을 박 대통령이 실현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시진핑이 우리 대통령을 ‘라오펑유(老朋友·오랜 친구)’라며 우호적으로 대한다는 건 다 안다. 그러나 이번 정상회담은 중국을 오랜 친구로 여기지 못하는 국민감정보다 너무 나갔다. 아산정책연구원이 3일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한반도에 전쟁이 날 경우 우리를 도울 나라로 중국을 꼽은 응답은 7.1%뿐이고, 90%가 미국을 믿는다고 답했다. 어쩌면 시진핑에게 김치 수출 정도 받아내고 우리는 한미동맹까진 아니겠지만 한미일 공조와 미국의 핵우산을 잃은 것이 아닌지 불안하기 짝이 없다.

더 큰 손실은 대통령의 신뢰 브랜드가 또 흔들렸다는 사실이다. 청와대가 공개한 비공식 대화 말고도 얼마나 더 깊은 얘기가 오갔는지 알 수가 없다. 한중이 가까워져 일본과 북한이 자극받고, 그래서 두 나라가 개과천선할지 몰라도 거꾸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로부터 신뢰를 잃을 공산도 크다. 우리야 많이 겪어봐서 면역력이 생겼다 쳐도, 대통령의 통일정책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제대로 굴러갈지 걱정스럽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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