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마틴은 35년전 나였을 수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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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머먼 사건’ 관련 18분 즉흥연설… 언론-SNS, 발언 놓고 찬반 후끈

“백화점에서 쇼핑할 때 추적을 당해 보지 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자는 많지 않다. 길을 걸을 때 차량에서 문 잠그는 소리를 듣지 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자도 많지 않다. 나도 상원의원이 되기 전까지는 그런 경험을 했다.”

19일 오후 예고도 없이 백악관 브리핑룸에 나타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절대 ‘흑인 남자’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대신 자신과 같은 미국 흑인 남자를 ‘아프리카계 미국 남자’라고 높여 말하며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기자들에게 털어놓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여성이 신경질적으로 가방을 끌어안고 문이 열려 내릴 때까지 숨을 참는 모습을 겪어 보지 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자는 많지 않다. 그런 일은 자주 있다”고 말할 때엔 애써 냉정을 잃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역사상 최초의 미국 흑인 대통령인 그는 13일 ‘지머먼 평결’이 나온 다음 날 짧은 성명을 냈지만 대중 앞에 서서 자신의 의견을 본격적으로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마음에서 나오는 진심 어린 연설”을 원했던 그는 사전 원고를 준비하지 않았다. 특유의 더듬거림을 숨기지 않고 이번 사안에 대한 고뇌를 그대로 드러냈다.

18분 동안 즉흥 연설을 통해 오바마 대통령은 지머먼 평결에 분노하는 흑인의 심정을 모든 국민에게 이해시키려 애썼다.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이번 사건을 (흑백 인종편견과 갈등에 대한) 사라지지 않은 일련의 경험과 역사를 통해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총을 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머먼의 정당방위에 목숨을 잃은 17세 흑인 소년 트레이번 마틴을 추모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해 사건 발생 직후 “나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트레이번 같았을 것”이라고 했던 자신의 발언을 상기시키며 “달리 말하자면 트레이번은 35년 전의 나였을 수도 있다”고 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감상적으로 과거를 개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미국인의 자기성찰(soul-searching)을 바란다”며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갈 수 있을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들이 있는지가 과제”라고 지적했다.

미국 사회의 오랜 인종편견이 나아지고 있다고도 했다. 그는 “(두 딸인) 말리아와 사샤, 그리고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그들은 우리보다는 낫다. 그들은 이 문제에서 우리보다 나은 상황”이라고 위로했다.

마틴의 부모는 즉각 성명을 내고 “오바마 대통령은 트레이번에게서 자신을 봤고 그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아이에 대한 아름다운 헌사였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머먼의 변호인단은 “이번 사건에 대한 인종적 맥락을 인정하고 이해하지만 사람들이 사안을 치밀하고 객관적으로 보길 바란다”며 이번 평결을 ‘인종편견’으로 보면 안 된다고 반박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언론은 대통령의 발언에 대한 찬반 논란으로 분주했다.

워싱턴=신석호 특파원 kyle@donga.com

#오바마#지머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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