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공감 Harmony/이 사람이 사는법]별 보는 영화평론가 정지욱 씨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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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보기의 가장 큰 지원군? 일본인 아내-고양이 딸이죠”

《 도시는 온통 암흑 천지였다. 숨소리마저 잦아들었다. “불 꺼요. 불 꺼.” 곳곳에서 울리는 음성만이 이곳에 여전히 사람이 있음을 알려줬다.

1970,1980년대 적의 공습에 대비해 실시한 등화관제 훈련. 한 달에 한 번, 적이 목표물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모든 전등을 끄는 훈련이 이뤄지곤 했다. 그때 허용된 불빛은 하늘 속 별빛과 달빛이 유일했다. 인공 불빛이 사라진 순간, 별과 달은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어린이회관에 모인 소년소녀의 눈빛도 반짝였다.

매일 밤 통금이 이뤄지던 시절이었지만 그곳에 모인 이들은 달랐다. 얼굴엔 미소가 가득한 채 발을 동동 굴렀다. 어린이회관에서 운영하는 ‘육영천문회’의 회원이었던 중·고교생들은 한 달에 한 번 밤을 새며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등화관제 훈련이
겹치는 날은 그야말로 가슴 벅찬 날이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정지욱 씨(46)도 육영천문회의 회원이었다. 정 씨는 “등화관제 훈련을 할 때면 그야말로 최고의 하늘이 펼쳐지곤 했다”고 회상했다. 하늘과 국가가 배달한 선물이었다. 》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하늘에는 별이 반짝인다. 별이 빛나기 전 먼저 반짝이는 것은 정지욱 씨의 눈이다. 서울 성북구 정릉동의 자택 옥상에서 천체망원경으로 별을 보고 있는 정 씨. 정 씨 품에 안긴 고양이 나나는 언제라도 함께 별을 볼 수 있는 가장 편한 친구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하늘에는 별이 반짝인다. 별이 빛나기 전 먼저 반짝이는 것은 정지욱 씨의 눈이다. 서울 성북구 정릉동의 자택 옥상에서 천체망원경으로 별을 보고 있는 정 씨. 정 씨 품에 안긴 고양이 나나는 언제라도 함께 별을 볼 수 있는 가장 편한 친구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별에 빠진 소년


정 씨가 별보기에 빠진 건 형을 따라 어린이회관에 갔을 때다. 우연히 별자리 설명을 듣게 됐다. 커다란 돔 모양의 천체투영기를 통해 전등 불빛이 반짝였다.

“어두컴컴한 머리 위로 불빛이 빛나고, ‘성모의 보석’이라는 음악이 깔리고, 변상식 선생님이 낭랑한 목소리로 봄철의 별자리에 대해 설명을 하시는데, 정말 으악 했죠.”

별자리 설명을 위해 만들어진 천체투영기의 인공 불빛만으로도 가슴 떨렸던 정 씨. 설명을 듣고 나오는데 천문회 회원을 모집한다는 안내문을 보게 됐다. 진짜 하늘 속 별빛을 보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낭랑한 목소리로 별자리를 설명하던 변상식 씨는 이후에도 육영천문회에서 정 씨를 가르치며 사제의 정을 맺었다.

천문회의 천체 관측은 한 달에 한 번 이뤄졌다. 그때마다 정 씨는 하늘 위로 소풍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통금 때문에 적막함이 도시를 감싸는 시간, 별과 달이 침묵을 깨고 속삭이는 듯했다. 어린이회관 수영장에서 천체망원경을 설치해놓고 별의 일주 운동을 관찰할 때, 잔잔하게 일렁이는 물결은 하늘에서 보내온 음파였다. 밤새 별보기를 마치고 새벽녘, 동물원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별과 달의 목소리인 듯했다. 묘한 흥분을 자아냈다.

별을 향한 열정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졌다. 지인들과 수시로 별을 보러 다녔다. 국내는 물론 해외도 마다하지 않았다. 1995년에는 태국으로 개기 일식을 보러 떠났다.

“완전히 해가 가려지는 순간, 붉은 노을이 온 하늘을 뒤덮어요. 직접 보지 않으면 그 감흥 모릅니다.”

몽골에서 꼬리를 길게 늘어뜨린 혜성을 맞닥뜨린 순간도 잊지 못한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어요. 덜컥 무서웠죠. 지금도 이런데 옛날 사람들은 혜성을 보며 얼마나 두려움을 느꼈을까 싶더라고요.”

별을 보는 예술인

이토록 별보기에 푹 빠진 정지욱 씨의 현재 직업은 영화평론가다. 동아일보를 비롯해 곳곳에 영화평론을 싣고 있다. 하루에 3,4편씩 영화를 본다. 1년 동안 감상하는 영화만 700편이 넘는다.

첫 직업은 미술관 큐레이터였다. 어렸을 때부터 미술사(美術史)에 관심이 많았다. 천주교도인 정 씨는 중·고등학생 시절 자신의 대부가 쓴 미술 관련 글을 많이 읽었다. 대부는 정 씨를 종종 미술관에 데리고 다녔고 자신이 쓴 글을 고쳐 쓰게 했다.

“큐레이터가 된 것은 운명이었던 같아요. ‘미술사’라는 안개가 낀 들판에 산책을 나갔는데, 한참 있다 돌아오니 이미 제 몸은 미술사라는 습기를 가득 머금은 거라고 할까요.”

대학교를 졸업하고 정 씨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일했다.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정 씨는 영화에 대한 글을 써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림이나 비디오아트 작품에 관련된 글만 써오던 터였다.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긴 했어요. 어차피 그림은 그 시대의 사회상과 문화를 담아낸다고 생각해요. 영화도 움직이는 그림이니 한 번 도전해보고 싶었죠.”

큐레이터를 거쳐 영화평론가가 된 정 씨. 현재는 ‘리웍스’라는 일본 잡지 발행사의 편집장 중 한 명으로 한국 영화와 사극에 관해 취재를 하고 글을 쓰기도 한다. 정 씨의 직업 어디에도 천체관측이나 천문학은 없다. 대학교 전공도 천문학이 아닌 다른 자연과학 분야였다.

“대학교에 갈 때 천문학을 전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하지만 굶어죽기 딱 좋은 학문이라며 주변의 반대가 심했죠.”

사실 미술사 공부도 밥벌이와는 좀 멀다. 큐레이터나 영화평론가도 돈을 많이 버는 분야는 아니다. 정 씨는 웃는다.

“결국 하고 싶은 걸 한 거죠. 미술사를 공부하면 시간이 쌓이는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돼요. 별을 보면 인간의 시간으로는 가늠하기 힘든 우주의 세계, 기나긴 그 시간에 대해 바라보게 되죠. 그렇게 그 둘은 맞닿아 있는 것 같아요. 영화는 긴 호흡으로 봐야 하는데 별 역시 긴 호흡을 갖고 봐야 하죠. 쉽게 얘기해서 그냥 제가 미쳐서 그러는 거예요.”

아내와 딸 그리고 함께 별을 보는 사람들

정 씨의 지인들은 정 씨를 ‘외계인’이라고 부른다. 외계인에게도 아내가 있고 딸이 있다. 외계인의 아내는 지구 속 일본이라는 곳에서 온 여자다. 그리고 딸의 이름은 ‘나나’로 네 발과 날카로운 발톱을 갖고 있다. 지구인들은 고양이라고 부른다.

“영화 ‘쿵푸팬더2’의 감상평을 쓰면서 ‘주인공 팬더의 아버지는 거위다. 영화는 주인공이 겪는 정체성 혼란을 다루고 있다’고 쓴 적이 있어요. 외계인과 일본인 그리고 고양이로 이뤄진 우리 가족도 그 팬더 가족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해요.”

아내와 딸 모두 정 씨에게는 가장 든든한 조력자다. 정 씨는 “나는 ‘쿨한 아내’와 ‘더 쿨한 딸’과 함께 산다”고 말한다.

정 씨는 초저녁만 되면 천체 망원경을 들고 집 옥상으로 올라간다. 계절을 가리지 않는다. 관측을 시작하면 7,8시간씩 있는 것은 기본. 겨울에는 코가 새빨갛고 온 몸이 꽁꽁 얼 때까지 있다가 내려온다. 아내의 배려가 없다면 지속할 수 없는 취미다.

가끔은 아내보다 더 의지하는 벗이 고양이 나나다. 별을 같이 보러 올라가면 같이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본다. 집필 작업을 할 때면 몇 시간이고 팔꿈치 아래에 머문다. 정 씨가 놀아 달라고 하면 놀아주지만 먼저 놀아 달라고 보채지는 않는다. 정 씨 부부와 나나는 밥그릇을 따로 구별해서 쓰지 않는다. 정 씨의 옥상 관측소 이름도 ‘나나천문대 정릉관측소’다.

아내와 딸 그리고 함께 사는 사람들이 있어 정 씨의 별보기는 더욱 빛이 난다. 정 씨는 틈만 나면 지인을 불러다 함께 별을 본다. 별보기 여행도 수시로 떠난다. 계절마다 그리고 날마다 다른 하늘과 별의 모습을 나눌 때면 우주 속 귀한 인연임을 실감한다.

“조만간 ‘영화인 천문 동호회’를 만들고 싶어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곳에서 편하게 별을 관측할 수 있게 하고 싶고요.”

별을 보는 영화평론가 정 씨는 아직 미치고 싶은 일이 많다.

한우신 기자 hanw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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