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109명이 풀어놓은 한많은 시집살이… 10권의 이야기책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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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 먹고는 남은 대가리도 손못대게 야단”
“13세에 민며느리… 시집구박에 자살 생각도”

전북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리 바닷가에서 연구자들이 이병래 할머니(75·가운데)의 시집살이 체험담을 듣고 있다. 도서출판 박이정 제공
전북 군산시 옥도면 선유도리 바닷가에서 연구자들이 이병래 할머니(75·가운데)의 시집살이 체험담을 듣고 있다. 도서출판 박이정 제공
“며느리 하나 죽는 거는 논둑 하나 무너진 거밖에 안 된다. 큰 소 한 마리 죽는 거보다 몬(못)하다.”

신동흔 교수
신동흔 교수
한때 시골 마을 부녀자들 사이에서 뜨겁게 달군 쇠집게 따위로 머리카락을 곱슬곱슬하게 하던 ‘불파마’가 유행했다. 몰래 쪽 찐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한 며느리는 시아버지 눈을 피해 수건으로 머리를 가리고 다녔다. 어느 날 물 길러 나가는 며느리를 가로막은 시아버지. “니 머리 뽂았제?” “다른 이도 다 뽂는데, 뭐 뽂으면 어떤교?” 시아버지는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하더니 끝내 며느리 하나 죽어도 별것 아니라며 모진 말을 내뱉었다. 자살까지 결심하고 나갔다 들어온 며느리에게 시아버지는 또 한 번 상처를 후벼 팠다. “뒤지러 갔으면 뒤지지, 뭐 하러 들어 오노?”

경북 포항시 청하면 상대리에 사는 김남규 할머니(84)의 젊은 시절 얘기다. 한 많은 세월에 이젠 주름이 굵게 파인 할머니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자신의 기구한 인생을 글로 쓰면 책 한 권은 족히 될 거라고. 호된 시집살이로 고난과 인내의 삶을 살아온 할머니 109명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구술자료가 출간됐다. 그것도 10권이 한꺼번에.

신동흔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비롯한 연구자 24명이 2008년부터 2년간 전국의 할머니들을 만나 시집살이에 얽힌 이야기를 채록해 ‘시집살이 이야기 집성’(전 10권·도서출판 박이정)을 펴냈다. 여성의 시집살이에 초점을 맞춰 구술 채록 작업을 한 것은 최초의 시도다. 책에는 진한 사투리가 밴 할머니들의 말투가 거의 가공되지 않은 채 그대로 실렸다.

정소덕 할머니(82·전남 진도)는 맏며느리로 아이 열 명을 낳아 키우면서 남편의 외도로 마음고생까지 했다. 남편이 밖에서 만난 여자를 집으로 데려와 몇 달씩 살게 했으니 심정이 오죽했을까. “각시를 닛(넷) 얻었어. 닛 얻어갖고 마지막 한 년은 애기꺼징 낳고. 다섯 달두 살다, 여섯 달두 살다, 가거덩.” 남편의 여자들은 정 할머니가 너무 착해서 미안하여 더이상 머물 수 없다며 떠나곤 했다.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 밑에서 살아온 이남화 할머니(77·충북 음성)는 친정어머니가 왔을 때 시어머니가 눈길도 주지 않은 기억이 뼈에 사무친다. “우리 어머니가 몇 번 울고 갔어요. 하도 노인네가, 시어머니가 사돈댁이 와도 본 척도 안 하고, 그래서 몇 번 울고 갔어요. 딸도 맨날 우는 거지.” 말년에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극진한 병 수발을 받고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 뒤 세상을 떴다.

책에는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빼곡하다. 서명순 할머니(81·전남 담양)는 결혼하자마자 남편이 군대에 가는 바람에 6년간 홀로 시댁을 챙기며 살았지만 늘 부뚜막에서 혼자 밥을 긁어 먹어야 했다. 시댁 식구들은 조기를 구워먹고 남은 대가리마저 며느리가 손을 못 대게 야단을 했다. 조미영 할머니(80·충북 제천)는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다른 집에 수양딸로 보내졌다. 수양아버지한테 자주 맞아 살 수가 없어 돌아오자 친아버지는 열세 살의 조 할머니를 동생까지 딸려 깊은 산중 마을에 민며느리로 보냈다. 시집에서도 구박이 계속되자 차라리 호랑이한테 물려 죽자며 밤에 동생을 이끌고 산으로 올라갔다.

연구팀은 수많은 경험담 중 왜 시집살이에 관심을 뒀을까. 신 교수는 “사회적, 가정적으로 약자였던 여성의 삶의 곡절을 표상하는 화두가 곧 시집살이”라며 “시집살이 체험담에는 절박한 삶이 있고 진정한 역사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책의 자료는 구비문학, 민속, 생활사, 여성사, 사회사 등의 연구에 기초 자료로 활용될 수 있고 기막힌 사연은 소설이나 드라마, 다큐멘터리 창작에도 좋은 소재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경로당 같은 곳을 통해 할머니들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면 대부분은 스스로를 조사 대상이 안 된다고 여겨 거절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막상 연구자들이 집에 찾아가면 할머니들은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신 교수는 “온몸으로 뼈저리게 삶을 감당해온 역정에서만 나올 수 있는 눈물과 감동의 언어들이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며 “그분들은 살아있는 철학자들이었다”고 말했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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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살이#민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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