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칼럼/조경란]예술보다 힘이 센 것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8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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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소설가
조경란 소설가
오래 붙들고 있던 단편소설을 마치고 나자마자 일본 도쿄로 와버렸다. 집을 자주 떠나곤 하지만 여름에는 휴가철이 다 지날 때까지 꼼짝없이 들어앉아 책을 읽거나 계절이 바뀌기만을 기다리는 편이었다. 올 8월은 보통의 여름과는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어쩌면 3월 11일 이후부터 나는 이런 시간을 준비하고 기다려 왔을지 모른다. 아는 이들에게 한동안 도쿄에서 체류할 거라고 말하자 “다른 데도 아니고 왜 하필 지금 그 도시인가”라는 질문과 염려가 돌아왔다. 그곳에 피붙이가 살고 있기 때문에, 혹은 동일본 대지진 후의 달라진 점들을 직접 보고 싶다는, 작가로서의 호기심 때문이라고 말한 적도 있지만 모두 적절한 대답은 아니다.

동생 부부가 조카들을 데리고 여름휴가를 떠나자 집에 혼자 남게 되었다. 한낮이었고 서울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밤낮을 거꾸로 사는 나는 잠에 빠져 있었다. 반짝, 눈을 뜬 것은 이것이 지진이구나 하는 본능적인 느낌 때문이었다. 이 흔들림이 더 심해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상상하느라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집을 떠날 때 제부가 당부하고 간 사항들도 생각나지 않았다. 신발장 위에 놓인 재난가방과 내 몫인 흰색 안전모. 내가 이 여름에 경험한 첫 번째 지진은 강도 1.0의, 여기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미미한 그런 흔들림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도쿄서 체류하며 지진공포 체험

흔들림이 멈추자 지갑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골목에서는 아스팔트 포장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사람들은 자전거를 탄 채 어디론가 쌩쌩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우리 식의 시장을 합해 놓은 것 같은 슈퍼마트로 가 저녁 찬거리를 샀다. 조금만 늦게 가도 싱싱한 채소나 과일들은 금방 동이 나버린다. 후쿠시마산이라고 산지를 표시해 놓은 오이나 채소들이 놓여 있고 누군가는 그것을 사거나 사지 않는다. 저녁 뉴스에서 그날 낮의 그 조용한 지진에 대한 보도가 자막으로 한 번 스치듯 지나갔다. 긴 체류를 결심하고 도쿄로 떠나올 때와 달리 대참사 후 일어난 변화들에 대해 나에게 들려줄 수 있는 이곳 사람들, 친구를 만나는 일을 가능한 한 늦추고 있다. 그저 평소보다 더 많이 걷고 보려고 할 뿐.

이곳 사람들은 ‘언젠가 그것이 올 것이다’라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예전보다 ‘그것’에 대해 더 준비하는 것밖에 없다고 여기는 느낌이다. 비상식량이나 물을 마련해 두고 가구들은 흔들려도 넘어지지 않도록 해놓고, 대피처를 숙지해 놓는다. 절전을 하느라 도쿄의 전철은 지난 10여 년 동안 내가 보아온 것 중 가장 어둡고 덥고 배차 간격도 길어지긴 했지만 정해진 시간에 잘 오고 잘 달린다. 내 눈에는 모든 것이 별 탈 없어 보이지만 역시 이방인의 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얻고 깨닫게 될지 알 수 없다. 특별한 사건을 목격하고 싶다는 마음도 없다. 개인적인 어떤 체험이나 기억을 갖게 될 수 있다면 그 장소에서 얻을 수 있는 의미는 이미 충분해진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예술적 영감일지라도 일상이 빠져 있다면 소설로, 글쓰기로 끌어들이기는 어렵다.

동일본 대참사가 일어난 지 5개월이 막 지난 오늘. 이른 새벽에 다시 바닥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진원지인 후쿠시마에서는 규모 약 6.0의, 도쿄에서는 2.0의 지진이 일어났다. 날이 밝았고 출근하는 사람들로 골목은 북적거린다. 아이들은 반바지를 입고 유치원에 간다. 오후가 되면 슈퍼마켓은 장을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릴 것이다. 나도 뙤약볕 속을 걸어 어디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간다. 평소의 나는 어떤 반복적인 것, 반복되어야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사는 일은 다르다. 삶이 아름다운 이유는 극복이나 도약 때문만이 아니라 반복하는 힘에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든다. 내가 지금 여기 머물고 있는 이유는 집으로 돌아가서 여일한 내 일상을 제대로 살아내기 위해 준비하는 그런 시간에 가깝다. 어떤 이에게는 여행이나 짧은 여름휴가가 그러하듯.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가을과 겨울을 계획하고 준비해야 한다. 뜻밖에도 나는 이곳에서 이 세속적인 일상의 질서와 의미에 대해 떠올리고 있는 모양이다.

일상이 빠져있으면 글쓰기 힘들어

지진이 아니어도 언젠가, 누구에게나 ‘그것’과 유사한 재난이 찾아올지 모른다.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란 알고 대비하는 것일지도 모르며 어떤 형태의 것이든 각자의 ‘안전모자’가 필요한. 그 틈에 일상은 계속되고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불안보다, 예술보다 힘이 세다.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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