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워크아웃 신청 100만명 시대]26세에 워크아웃→35세에 졸업… 표상용 씨 제2인생

  • Array
  • 입력 2011년 6월 21일 03시 00분


코멘트

“빚 독촉에 시달린 어머니 ‘내 아들은 죽었다’
장사-막노동… 信不 주홍글씨 8년만에 지워”

“빚 다 갚았어요” 8년여 만에 빚을 모두 갚은 표상용 씨가 17일 서울 중구 명동 신용회복위원회 명동지부에서 ‘채무변제계획 이행확인서’를 받으며 큰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미소를 짓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빚 다 갚았어요” 8년여 만에 빚을 모두 갚은 표상용 씨가 17일 서울 중구 명동 신용회복위원회 명동지부에서 ‘채무변제계획 이행확인서’를 받으며 큰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미소를 짓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마지막 남은 빚을 갚던 날, 어머니가 펑펑 울었어요. 마치 죽었던 아들이 돌아온 것처럼 말이죠.” 표상용 씨(35)는 2일 밤새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2002년 12월 금융채무불이행자(옛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뒤 신용회복위원회에 채무조정을 신청한 이후 8년여간 입에도 대지 않던 술이다. 빚 독촉을 견디다 못해 수면제를 먹고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렸던 일을 비롯해 8년간 사회의 밑바닥으로 추락해 고생했던 지난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17일 서울 중구 명동 신용회복위에서 만난 표 씨의 얼굴은 의외로 밝았다. 새 출발을 하는 사람답게 말쑥한 옷차림에 헤어젤로 머리단장까지 했다. 이날 그는 금융회사에 진 빚을 모두 갚아 신용이 회복됐음을 증명하는 ‘채무변제계획 이행확인서’를 받았다.

표 씨는 빚의 수렁에 빠졌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교과서 같은 사례다. 한국 경제 최대의 불안 요인인 ‘가계부채 폭탄’이 터져 표 씨 같은 금융채무불이행자가 양산되면 2003년 신용카드 대란(大亂)에 버금가는 금융시장 혼란이 재연될 가능성이 높다. 카드 대란의 희생양이 돼 20대 청춘을 빚 갚는 데 저당 잡힐 수밖에 없었던 표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자신도 모르게 빚의 수렁에 빠져

표 씨는 2000년 대기업 제과업체의 영업사원으로 취직했다. 외환위기 직후 어렵게 잡은 직장이어서 의욕적으로 일했지만 매번 영업 할당량을 맞추지 못했다. 부족한 매출을 자신의 돈으로 채워 넣었다. 2002년은 카드사들이 길거리에서 ‘묻지 마 발급’을 해주던 때로, 돌려막기를 하면서 그에게도 8개의 신용카드가 쌓였다. 필요한 돈은 카드 현금서비스로 조달했다.

“카드사 직원들이 영업소까지 찾아와서 카드 발급을 권유할 때였으니까요. 현금서비스 한도가 100만 원이었는데 대기업 계열사라며 한도를 2배로 늘려줬을 정도예요. 돌려막기를 하다 보니 빚이 수천만 원으로 불어나는 것은 순식간이었어요.”

연체가 시작되자 카드는 하나둘 사용이 정지됐다. 카드사의 빚 독촉 전화가 빗발쳐 더는 회사생활이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표 씨의 어머니는 카드사 전화에 지쳐 “우리 아들 죽었으니 찾지 말라”며 전화를 끊었다. 멀쩡히 살아있는 아들을 죽었다고 말하는 어머니를 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이었다.

‘내가 죽어버리면 남은 빚은 부모님이 알아서 하겠지.’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결심한 것은 2002년 가을이었다. 술과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고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렸다. 담담한 어투로 자신이 신용불량 상태에 빠져드는 과정을 설명하던 표 씨도 자살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을 글썽였다. 그를 살린 건 낚시꾼들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죽음까지 시도했다가 살고 보니 ‘도망치지 말고 책임을 지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 한 번의 실수로 ‘빚’에 바친 20대 청춘

2002년 12월 어머니와 함께 신용회복위를 찾았을 당시 매섭게 몰아치던 칼바람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당시에는 신용회복위의 전산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워크아웃 신청자가 직접 금융회사를 찾아다니며 ‘채무확인서’를 받아와야 했다. 금융회사들은 이자를 깎아주는 개인워크아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아 그를 문전박대하기 일쑤였다. 그는 “어떻게든 갚아보려고 찾아갔는데 죄인 취급받는 것 같아 무척이나 서러웠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신용회복위에서는 원금과 이자를 합쳐 4174만 원이던 표 씨의 채무를 3811만 원으로 조정한 뒤 본격적인 개인워크아웃 절차를 개시했다. 표 씨의 고단한 삶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신용불량자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탓에 일반회사 취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경기 수원으로 내려갔다. 후배의 소개로 알게 된 한 재래시장의 과일가게와 정육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월급 140만 원 중 100만 원을 어머니에게 보내 일부는 금융회사에 진 빚을 갚고 나머지는 지인에게 빌린 돈을 갚았다. 20만 원은 월세를 냈고 10만 원은 훗날 자활을 위해 저축성 보험에 가입했다. 남은 10만 원으로 한 달을 버텼다. 밥을 얻어먹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가게에서 있는 힘을 다해 일했다. 가게가 문을 닫는 날에는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했다. 이렇게 8년 하고도 5개월의 시간이 흘러갔다.

○ “빚을 피하려고 하면 결국 수렁에”

그는 26세에 워크아웃에 들어가 35세가 되는 올해 6월 2일 96번째 상환을 끝으로 빚을 모두 갚았다. 인생의 황금 같은 시기를 빚 갚는 데 바쳐야 했지만 그가 얻은 것도 많다.

“저도 그랬듯이 빚 부담에 시달리게 되면 이리저리 피해갈 방법만 찾게 돼요. 결국 돌려막기를 하게 되고 빚은 순식간에 불어납니다. 워크아웃 기간에 고통스러웠지만 절약하는 습관, 상황에 맞게 소비하는 법을 배웠어요.”

표 씨는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워크아웃 중에도 저축성 보험과 예·적금에 가입해 착실히 돈을 넣었기 때문에 모은 재산도 제법 된다. “평범한 삶이 너무 그리웠어요. 여느 직장인처럼 아침저녁에 출퇴근하고 일요일 하루 쉴 수 있으면 더 바라지도 않아요.” 그는 “빚은 자기가 쓴 돈이니 결국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며 “생활습관을 바꾸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혼자 고민하지 말고 주변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라”고 했다.

김철중 기자 tnf@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