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이문원의 쇼비즈워치]‘써니’의 성공…시대향수 한계가 80년대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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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6월 15일 11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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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써니'의 흥행 파죽지세가 화제다. 13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 입장관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 5월 4일 개봉한 '써니'는 개봉 6주차를 맞아 '쿵푸 팬더 2'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에 이어 주간 흥행 3위를 차지했다.

개봉 6주차에 3위라는 점 자체가 이미 이례적인 현상이지만, 쟁쟁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몰려든 여름시즌 초엽에 한국 소품코미디가 기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더욱 인상적이다.

'써니'는 10~12일 사이 27만1987명을 동원해 누적 468만1484명을 기록했다. 500만 돌파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러면 올 초 개봉된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을 제치고 2011년 한국영화 흥행 1위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나름대로 빈집털이' 통해 성공?

'써니'의 흥행원인 분석은 의외로 간단하다. 소품코미디가 맹활약했다는 점에서 이변처럼 다뤄졌지만, 사실 예측범위 안이었다. '애드맨' 등 몇몇 영화전문 블로거들은 이미 개봉 전 500만 이상 대박을 예상하기도 했다.

먼저 근래 주요 흥행코드가 된 '여성영화'의 올해 첫 타자였다는 점에서 극히 유리했다. 지난 2008년의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2010년의 '하모니' 등 최근 들어 여성들끼리의 유대를 다룬 여성영화들이 봄 시즌에 300만 이상 대박을 터뜨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20~30대 여성관객들이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현 구도 내에선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그런데 올해 봄에는 이에 합당한 영화가 없었다. 결국 그 수요가 5월까지 끌려 들어와 '써니'의 대박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다음으로 노스탤지어 전략을 이용해 전형적인 슬리퍼 히트 구도를 만들어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써니'가 무대로 삼는 1980년대는 386세대 후반, 포스트386세대 초반에 걸쳐 강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시기다.

현재 30대 후반~40대 초중반이 된 세대다. 이 세대 여성층은, 비록 트렌드를 따르는 속도는 느려도 여전히 대중문화상품 소비욕구가 왕성하다. 대중문화 빅뱅 시기인 199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탓이다.

그러니 일단 초반흥행만 잡아두면, 이후 소비계층이 20~30대 여성층에서 40대까지 확장되며 슬리퍼 히트 구도가 나오게 된다. 나아가 '어머니와 딸이 함께 보는' 가족동반 관람도 이어진다.

이같은 다세대 타깃을 현실화하기 위해, '써니'는 '배경은 1980년대인데 정서는 2010년대'라는 꽤 전략적인 스탠스를 취했다. 근래 '위험한 상견례' 등에서도 목격된 바 있는 흥미로운 스탠스다. 중년층은 영화 속 몇몇 도구나 장치들에 노스탤지어를 느끼고 청년층은 낯선 배경에도 이야기 흐름과 정서 자체에 공감하는 효과를 내준다.

끝으로, 개봉시기치곤 대진운이 유난히 좋았다. 보통 5~7월까지는 여름용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시기로 잘 알려져 있다. 아무리 블록버스터급이더라도 한국영화는 8월 즈음부터 출격에 들어간다. 할리우드 자체가 자신들 최대급 무기를 5~7월 사이 풀어놓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는 상황이 달랐다. 될 것 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별로 없었다. '지나치게 남성용'인 '분노의 질주: 언리미티드', 대개 잘 풀리는 수퍼히어로 물이긴 하지만 원작 브랜드 밸류가 떨어지고 설정 자체도 한국관객이 즐기는 스타일이 아닌 '토르: 천둥의 신'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또 이미 4편째에 접어들어 프랜차이즈 피로감이 심한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 역시 번외편 포함 프랜차이즈 5편째가 돼 피로감이 늘어난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등의 흥행도 미미했다. 타깃 별로도 '쿵푸 팬더 2' 정도 외엔 딱히 여성층을 대거 흡수할 만한 콘텐트가 없었다. 결국 '나름대로 빈집털이'가 가까웠다는 것이다.

●80년대 노스탤지어로 10년, 90년대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이 있다. 1980년대 배경을 통한 노스탤지어 콘셉트 부분이다.

얼핏 보면 이 전략은 더 없이 계산적인 콘셉트로 보인다. 1970년대 중반을 무대로 중년남성층 노스탤지어를 강하게 자극했던 '친구'가 800만 관객을 돌파한 게 딱 10년 전인 2001년이다.

3년 뒤인 2004년엔 '친구'보다 정확히 3년쯤 뒤를 배경으로 한 듯한 '말죽거리 잔혹사'가 3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 영화는 끝나는 시점에 등장인물들이 1979년 개봉한 성룡의 '취권'을 보러가는 장면이 나오니 1977~78년 즈음이 배경임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그로부터 딱 10년, 7년 뒤에 정확히 1980년대 중반 즈음을 배경으로 한 영화, 그것도 그 사이 달라진 관객분포를 토대 삼아 중년여성층 노스탤지어를 강하게 자극하는 영화가 성공하리라는 건 그야말로 '산수'의 문제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만 볼 것도 아니다. 한국영화계에서 1980년대 노스탤지어는 지금 처음 나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상 '친구'가 등장했던 21세기 초엽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노스탤지어 자극이라는 명목 하에 1970년대와 80년대 배경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었다는 얘기다.

2001년 슬리퍼 히트를 기록한 '번지 점프를 하다'가 한 예다. 물론 영화 속에선 대학생들이 주인공이긴 했지만, 분위기상 1980년대 중반이 배경이란 점에서 몇 년 더 빼서 고등학교 시절로 무대를 옮기더라도 여전히 1980년대다. 1980년대 청춘의 노스탤지어다.

2002년 겨울 등장해 역시 슬리퍼 히트를 기록한 '품행 제로'도 있다. 빼도 박도 할 것 없이 딱 1980년대 고교생들의 청춘 스토리다. 어떤 의미에선 '써니'보다도 더 정교하고 정확하게 1980년대 청춘군상을 묘사한 영화다.

같은 해 개봉해 240만 관객을 동원한 '몽정기' 역시 1980년대 중학생들의 성적 호기심을 다룬 영화였다. 이후에도 1980년대는 한국영화계에서 여러 차례 등장했다.

1980년 광주를 배경으로 한 '스카우트' 정도까지도 아슬아슬하게 넣어준다면 사실상 1980년대는 2000~2010년 사이 1970년대보다도 더 인기 있는 노스탤지어 자극용 배경이었다. 그 흐름이 '써니' 직전 '위험한 상견례'까지 갔다. 그리고 '써니'에서 '한 번 더' 폭발했다.

이러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21세기 초반 1970년대와 1980년대 배경설정이 노스탤지어 자극용으로 동시진행된 것까진 이해가 갈만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트렌드의 시발점으로부터 10년이 지난 상황이다. 지금쯤이라면 당연히 '그로부터 10년 뒤'인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노스탤지어성 영화가 나와 줄 타이밍이다.

그런데 어째서 한국영화계는 되돌이표처럼 계속해서 1980년대로만 돌아가고, 1990년대엔 얼씬도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노스탤지어 전략의 기본으로 봤을 때 40대 중년층보다 더 대중문화상품 소비욕구가 왕성한 현 30대, 19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세대를 타깃으로 삼는 게 2011년 현 시점 더 유리한 전략이 아니겠느냐는 의문이다.

●미국도 90년대 노스탤지어는 없다?

그러나 잘 따져보면 이 같은 노스탤지어의 '밀어내기식' 세대교체 논리는 다소 허랑하다는 점을 알게 된다. 미국 예만 들어봐도 알 수 있다.

한국이 1980년대 노스탤지어를 응용하기 시작한 게 2001년 무렵부터라면, 미국은 이를 1997년 즈음부터 활용하기 시작했다. '로미와 미셀' '그로스 포인트 블랭크' '웨딩 싱어' 등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거나 1980년대의 추억을 10여년 뒤 곱씹어보는 영화들이 이 시기 물밀 듯이 밀려들어왔고, 상당부분 흥행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뒀다.

문제는 그 이후다. 이후에는 할리우드는, 적어도 노스탤지어 자극이라는 전략에 있어서는, 1990년대 배경으로 넘어간 일이 거의 없다. 계속 1980년대에 머물렀다. 그러다 급기야는 지난해 50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SF코미디 '핫 텁 타임머신'까지 이어졌다.

1997년 '그로스 포인트 블랭크'로 1980년대 고교생활을 추억했던 존 쿠삭 본인이 2010년에도 여전히 1980년대로 돌아가는 타임머신 코미디에 출연한 것. 할리우드도 1980년대 되돌이표인 건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어째서 1990년대는 벌써 20년이 지난 현 시점까지도 노스탤지어가 되지 못하고, 1980년대에 그 자리를 뺏기고만 있는 걸까. 물론 이유는 있다. 세부적인 조건은 앞선 한국과 미국이 서로 다르긴 하지만, 원칙적인 부분에선 동일하다. 1990년대와 지금은 서로 '다른 게' 없기 때문이다. '달라진 게' 없으니 당연히 노스탤지어 효과도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그렇다.

먼저 미국부터 살펴보자.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넘어오면서 미국은 어마어마한 수준의 정치사회적 변화를 겪었다. 바로 냉전의 종식이다. 베를린 장벽은 무너졌고, 구(舊)소련은 페레스트로이카를 단행했다. 그러자 냉전 코드 아래 팽팽하게 묶어있던 끈이 끊어졌다.

1991년 걸프전이 일어났지만, 미국의 전쟁에 대해 미국 국민들마저도 분분한 의견을 보냈다. 석유를 쟁취하기 위한 탐욕의 전쟁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위치에 의문을 보내는 시선이 늘어갔고, 사회 전체 분위기도 다소 냉소적으로 변했다.

그런 분위기 하에서 시대정신을 읽어낸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 클럽' 등이 시대적 코드로 등장했고, 여타 대중문화 장르도 비슷한 분위기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5~20년이 흐른 현 시점, 미국은 놀라울 정도로 당시와 달라진 부분이 없다. 9.11 테러 이후 이라크 침공이 이뤄지면서도 1991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회의론이 급격히 일었다. 이를 풍자한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화씨 9/11'이 극장용 다큐멘터리 역사상 최대의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1994년 당시 '펄프 픽션'을 통해 원더키드로 등극했던 쿠엔틴 타란티노는 21세기에도 '킬 빌'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등의 히트작들을 내며 여전히 원더키드처럼 여겨지고 있다.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나 문화 흐름면에서 1990년대는 노스탤지어를 내 줄만큼 강렬한 차이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국도 90년대나 지금은 '다를 바' 없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1990년대는 1970~80년대에 걸친 고도성장의 열매를 막 따먹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결실로 인해 정치, 사회, 문화적 자유도 충분히 주어졌다. 이후로는 소비, 소비, 소비의 연속이었다.

2011년 현 시점, 과연 달라진 게 있을까. 놀라울 정도로 찾아보기 힘들다. 인터넷의 등장, 휴대폰의 등장 등 테크놀로지 부분에서의 진일보만 이뤄졌을 뿐 사회분위기나 문화 흐름면에선 달라진 부분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매일매일 포털사이트를 통해 재벌가 자녀들의 소비행각이 화제가 되며 경제양극화 현상이 지적되고 있지만, 1990년대 초반에도 이미 '오렌지족' '야타족' 현상 등을 통해 이런 문제는 일찌감치 부각됐다.

1992년 데뷔한 서태지가 아직까지도 '문화대통령' 소리를 들으며 그의 사생활 스캔들이 지상파방송 메인 뉴스에까지 등장한다. 좌우파 간 정치적 갈등 역시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별로 없다.

하루가 다르게 모든 것이 미친 듯이 뒤바뀌어가던 고도성장이 끝나고 이제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접어든 한국사회는, 그만큼 사회변화도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은 1990년대보다 더 후퇴한 느낌마저 든다. 특히 문화적 흐름면에서 그런 현상이 포착되고 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시작된 경제 불황은 대중의 왕성한 문화소비욕과 다양성에 대한 욕구를 일순간에 저하시켰다.

당시 유행하던 예술영화전용 시네마데끄들은 이제 역사 속 유물이 됐고 앨범을 10만 장 이상 팔아치우며 일약 준메이저로 등극한 홍대 인디밴드들은 다시 홍대 앞 벙커로 숨어들었다.

지금 이 시기를 되돌아보는 영화가 등장한다면 과연 현대 청년층에 어떻게 비춰질까? 아니, 그 시절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30대들에겐? 과거의 노스탤지어로 비춰질까, 아니면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처럼 여겨질까? 차라리 후자 쪽에 무게가 실린다.

그러니 한국영화 역시 영원히 1980년대로 도돌이표를 찍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과는 '확실히 다른' 시대, '사람'이 달랐던 시대, '생각'이 달랐던 시대는 근 20년 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앞으로 10년 뒤, 2020년이 되더라도, 한국사회에 뭔가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노스탤지어는 영원히 1990년대에 이르지 못하리라는 예상도 충분히 가능해진다.

●1970년대 생, '샌드위치' 세대의 비극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시대의 진행 속에서 이렇듯 '가운데 낀' 세대는 언제든지 등장한다. '가운데 낀' 샌드위치 세대의 특성 중 하나가 바로 '노스탤지어의 독보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일흐름이 수십 년 간 지속되다보니 노스탤지어도 '나만의 것'이 되지 못하는 경향이다.

그러다 보면 '써니'와 같은 문제도 등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써니'의 감독 강형철은 올해 우리 나이 37세, 1990년대에 청춘을 보낸 인물이다. 그런데도 그의 영화는 1980년대에 꽂혀있다. 앞선 이유 탓일 것이다.

1990년대에 대해 뭔가 지금과 다른 부분을 제시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해당 시기를 살아온 인물마저도 추억하기 힘든 시대, 그런 인물마저도 자신보다 앞선 세대를 '물어물어 들으며' 억지로 노스탤지어를 재현해내야만 한 시대. 그게 바로 1990년대다.

그러나 역시, 일기장에서나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세대는 나름 불행한 세대라는 생각이 든다. 10년 뒤에도 여전히 '써니'와 같은 1980년대 회고담이 등장한다면, 그 때에도 여전히 '펄프 픽션' 세대가 같은 분위기의 문화형태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더더욱 그럴 것 같다.

조용히 숨죽이고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현 30대, 1970년대 생이 갖고 있는 또 다른 비극의 한 단면이다.

※ 오·감·만·족 O₂플러스는 동아일보가 만드는 대중문화 전문 웹진입니다. 동아닷컴에서 만나는 오·감·만·족 O₂플러스!(news.donga.com/O2)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fletch@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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