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4·19 사죄’ 어떻게 볼 것인가]“서구민주주의 도입 초석 놓아”

  • Array
  • 입력 2011년 4월 19일 03시 00분


코멘트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
1960년 4월 26일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국민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 것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경계였다. 그것은 국가 안보를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하는 국가 지도자로서 당연한 임무 수행이었지만, 필자에게는 단순한 반공정책의 확인을 넘는 의미심장한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말 강대국들의 이권 침탈에 맞서 싸웠던 독립협회 소속의 자유주의 혁명가로서 이승만은 약소국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동맹국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고종 황제도 그것을 깨닫고 한반도에 대해 영토적 야심이 없는 유일한 강대국으로 생각되던 미국을 동맹국으로 붙잡으려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고종 황제의 꿈은 반세기가 지난 1953년에야 이승만이 미국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었다. 그 후 대한민국은 국가안보 장치를 확보함으로써 경제 성장에 전념할 수 있었다.

미국과의 동맹은 오랫동안 중국 중심의 대륙문명권에 속해 있던 남한 지역을 미국 중심의 해양문명권에 편입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에 따라 대한민국 국민은 새로운 문명, 즉 미국의 자유주의적인 생활 방식을 배우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자유민주제의 초석이 놓이기 시작했다. 오랜 미국 생활에서 ‘정치적 자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던 이승만은 선거만은 정기적으로 치렀다. 6·25전쟁의 극한 상황에서도 선거를 연기하지 않았다. 국회를 해산하거나 헌법을 정지시킨 적도 없었다. 그가 무리하게 도입한 대통령 직선제도 끝까지 유지했다. 자유당과 민주당의 양당제도가 유지되고 ‘동아일보’와 ‘사상계’가 그의 정부를 맹렬히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표현의 자유를 허용했다.

그의 업적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나라를 움직이고 새로운 문명에 적응하는 데 필요한 인재의 보존과 육성이었다. 건국 초기에 인재가 부족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교육받고 경험을 쌓은 엘리트를 보존하는 한편 그들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외국 유학을 적극 권장했다. 그 때문에 가난한 나라였음에도 그의 대통령 재임 시에 5000명에 가까운 정규 유학생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한미동맹의 이행에 따라 도입되는 최신 군사장비에 관한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1만 명 이상의 군인이 미국으로 연수를 떠났다. 그렇게 해서 길러진 새로운 인재들은 1960년대 이후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귀중한 역군이 되었다.

이승만의 대통령 재임과 관련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으로 떠오르는 사실은 그의 재임 기간에 지역주의의 병폐가 두드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남 광양 출신의 조재천이 대구에서 경북지사와 세 차례 국회의원을 지내고, 부산 출신의 강성주가 전남 목포에서, 그리고 경남 산청 출신의 이필호가 광주에서 세 차례 국회의원을 지낸 사실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지역적 편견이 없던 이승만의 전국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승만의 북진통일론도 오늘날 이승만을 생각하게 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된다. 여기서 북진통일이라 함은 군사적인 의미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생활 방식을 북한 지역으로 확산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룩하게 된다는 문명적인 의미이다. 다시 말해, 북한도 대한민국처럼 대륙문명권에서 벗어나 해양문명권으로 편입되는 ‘문명사적 대전환’을 겪어야 남북통일이 가능하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주영 건국대 명예교수·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공동대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