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주목 이 선수①] 이일희 좌충우돌 LPGA 경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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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월 5일 17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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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대로, Q스쿨 연장 끝 LPGA 막차 탑승, 그러나…
가시밭길, 7번의 연속 컷 탈락…생활비 걱정에 막막…
오르막길, “꿀릴 것 없다”이 악 물어…극적 시드 유지

LPGA 투어 Q스쿨 막차. 7개 대회 연속 컷 탈락의 고비를 넘기고 끝까지 살아남은 이일희가 2011년 새 희망을 위해 힘찬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LPGA 투어 Q스쿨 막차. 7개 대회 연속 컷 탈락의 고비를 넘기고 끝까지 살아남은 이일희가 2011년 새 희망을 위해 힘찬 비상을 준비하고 있다.
“모든 걸 다 경험했던 것 같아요”

이일희(23·PANCO)는 이 한마디로 지난 1년을 정리했다. 2010년 미 LPGA 투어에서 천당과 지옥을 모두 경험했다. 2009년 LPGA 투어 퀄리파잉스쿨에서 연장 접전 끝에 마지막 투어카드 한 장을 획득하며 가까스로 입성했던 것만큼 극적인 시즌이었다. 7개 대회 연속 컷 탈락도, 3라운드까지 선두를 달리는 꿈같은 경험도 했다.

LPGA 투어에서 한국 선수들이 쉽게 우승한다고 생각하겠지만, 투어 우승에 이르기까지 거쳐야하는 통과 의례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어렵다. 이일희는 먼 길을 돌아 우승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다.

● 꿈의 무대 입성, 그러나 7개 대회 연속 컷탈락

이일희는 서희경이 우승한 기아클래식을 통해 생애 첫 경기를 치렀다. 공동 67위. 그럭저럭 무난한 성적표였지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5월 2일 트레마리스 챔피언십부터 8월 22일 세이프웨이 클래식까지 7개 대회에서 모두 컷 탈락했다.

“이건 좀 심하다. 이제 LPGA 투어에서 못 뛰겠구나” 싶었다. “일단 7번이나 컷 탈락을 하고 보니 상금을 타지 못해 돈이 없었다. 캐디 월급도 줘야하고, 이동도 해야 하고, 숙소도 잡아야 하는데 막막했다”고 했다.

● 피할 곳은 없다. 모든 걸 던져라

새로운 환경, 언어, 성적도 모든 것이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이일희가 서있는 자리는 전 세계에서 가장 냉혹한 승부처인 LPGA 투어였다.

“이런 저런 상황들이 맞물려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 7월 코닝클래식에서 6번째로 컷 탈락 하던 날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다. ‘너 정말 LPGA에서 뛰고 싶어?’. 대답은 ‘너무 하고 싶어’였다.” 죽기 살기로 모든 걸 걸어보자고 생각했다. 남은 대회는 5개 뿐이었다. 순위를 끌어올리지 못하면 LPGA 투어는 한여름 밤의 짧은 꿈이 될 터였다.

● 주눅들지 말자…넌 최고다!

시드 유지가 불투명해지자 KLPGA 투어 시드 유지를 위해 한국 대회 출전도 함께했다. LPGA 투어 경비 마련도 목적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일희는 지난 8월 1일 끝난 히든밸리여자오픈을 8위로 마감했다. 이후 매주 일요일 밤 한국 대회를 마치고 LA까지 비행기를 타고 날아간 뒤 LPGA 대회 현장까지 가는 일을 반복했다. 피곤과 시차를 느낄 경황이 아니었다. 나름의 소득을 얻고 미국으로 돌아가 세이프웨이 클래식에 출전했지만 결과는 역시나 컷 탈락.

이틀 동안이나 ‘집에 콕 처박혀’ 생각에 빠졌다. “대체 왜 미국에만 오면 이렇게 달라질까.” 이일희는 그 때서야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게 LPGA 투어에 주눅이 들어있었다는 것을. 모든 해답은 자신의 마음 안에 있었다.

‘나도 멋있는 사람이다. 꿀릴 것 없다’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나는 비록 느리지만 해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늘 해왔다”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뒤이어 출전한 캐나디안여자오픈에서 드디어 컷 탈락을 면했다. 공동 54위지만 고통스러웠던 컷 탈락의 터널에서 벗어난 것만도 엄청난 소득이었다.

● 우승 문턱까지 경험, 시드 유지도 감격

컨디션이 살아나고 있었지만 남은 대회는 단 2개. 최소 한 곳에서는 톱5안에 들어야 내년 시드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한다는 간절함 뿐이었다.”

10월 CVS파머시 LPGA챌린지에 출전한 이일희는 1, 2라운드에서 경기를 잘 풀어내며 공동 4위로 순위를 끌어올렸다. 3라운드에서는 4타를 더 줄이며 공동 1위까지 치고 나섰다.

하지만 최종라운드에서 흔들렸다. 뒷심 부족이 아니라 경험 부족이었다. 이날따라 한국 갤러리들도 많았는데 최종라운드 경기 도중 “그럴 줄 알았다. 괜히 왔다”는 말까지 들려왔다. “3번홀까지만 잘 넘어가면 우승도 노려보겠다고 생각했는데, 처음부터 안 풀렸다. 갤러리들이 하는 말을 들었지만 그럴수록 이를 악물고 더 잘 쳤어야 했는데 이미 너무 떨렸다. 15등에 그쳤고 너무나 속상했다”고 했다.

● 선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따듯한 격려

12월 5일. LPGA투어챔피언십 1라운드 그 운명의 날이 밝아왔다. 그날따라 동료 선수들이 너무도 많은 격려를 해줬다. 신지애는 “너를 위해서 기도할게. 꼭, 내년에 함께 했으면 좋겠어”라고 했다. 최나연도 김송희, 지은희도 한결같이 찾아와 등을 두드려줬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혼자 투어 생활을 하면서 어쩌면 그런 격려의 말들을 가장 듣고 싶었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힘을 얻은 이일희는 신중하게 마지막 대회에 나섰다. 혼신의 힘을 다한 이일희는 30명만 나설 수 있는 최종라운드까지 진출했고, 결과는 공동 7위. 극적으로 시드를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이일희는 8일 동계훈련을 위해 미국 댈러스로 출국한다. 작년 하반기에 든든한 스폰서도 생겨 투어 생활은 한결 편해지게 됐다.

첫 해에는 레슨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올해는 레슨코치와 트레이너까지 철저하게 준비했다. 집과 차도 렌트했다. “지난해 너무 고생을 해서 이제는 힘들 것이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오로지 성적을 내는 일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됐다.

이번 시즌 활약을 기대하는 이유는 지난 1년 누구보다 다양한 경험을 했던 이일희가 얻은 중요한 깨달음 때문이다. “LPGA 투어에서 뛰는 140명의 선수들은 아주 작은 실력 차이로 서 있다. 나 역시 7번 컷 탈락 했지만 다른 선수들에게 ‘너 잘 치는 줄 알았는데’라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 비슷하다. 그만큼 실력보다는 심리적인 면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원성열 기자 sereno@donga.com
사진|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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