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칼럼]흑백논리 史觀의 친일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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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15일 20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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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은 일제 총독부 전직 관료들을 싫어하면서도 등용했다. 총독부 판사를 지낸 사람을 법무부 장관으로 쓰면서 “일제 앞잡이를 20년이나 했구먼”이라고 마뜩잖아 했다. 이 대통령은 해방 후 정국에서 ‘친일 청산’보다는 ‘공산화 저지’가 더 급하다고 판단했다. 이 대통령이 공산당과 싸우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 친일파 관료와 경찰을 동원하고, 확고한 ‘반공(反共)’으로 남쪽의 자유와 번영을 지킨 것은 당시로서는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최근 친일인명사전을 펴낸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보도자료에서 ‘용공(容共) 좌익세력들의 국가정통성 훼손’이라는 비판에 대해 ‘친일 친미 친독재로 기회주의적인 변절을 거듭한 자들과 그 후예들이 치부를 감출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반공이었다’고 응수했다. 반공을 곧바로 ‘친일 친미 친독재’와 연결짓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오늘의 북한 현실이나 냉전 후 국제질서를 보더라도 이 대통령의 ‘현실적 반공’은 사후에 정당성을 얻었다.

임 소장은 한 인터뷰에서 “내가 반공법 위반 등으로 두 번 옥살이(문인간첩단 사건, 남민전 사건)를 했지만 다 민주화유공자로 확인을 받았다”고 말했다. 남민전은 도시게릴라 투쟁을 벌이려던 자생적 공산주의 조직이다.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한 사건이다.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의 결정을 통해 ‘오류’가 바로잡힌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리영희도 비판한 임헌영의 관점

임 소장은 2005년 리영희 씨와의 대담을 수록한 ‘대화’에서 ‘미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수정주의적 관점을 편든다. 그러자 리 씨는 “고르바초프 정권 이후에 소련에서 한국전쟁 관련 기밀문서가 대량으로 비밀 해제돼 1948년 말경부터 북이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음이 밝혀졌다”고 설명하면서 오류를 지적한다. 이어 임 소장이 맥아더의 ‘6·25 전황 조작설’이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말하자 리 씨는 “미국의 의도가 불순하다는 선입견 때문에 고정관념으로 단정하는 일일랑 경계하라. 과학적이 되라”고 충고한다.

임 소장은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총선거에 대해서도 ‘친일파들이 득세하여 통일을 위한 남북협상파들이 불참한 가운데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보낸 지령문을 보면 소련군은 북에 진주한 직후부터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했음이 드러났다.

좌파 현대사 연구의 대부(代父)격인 리 씨는 ‘대화’에서 “이북에서는 새나라 건설과 사회혁명의 열기가 충천하고, 일제시대의 친일파를 비롯한 호의호식하며 권세를 누렸던 자들이 깡그리 청소되고 있었는데, 같은 민족의 땅 이남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태는 한숨과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라고 말한다. 리 씨는 “좌익인사들이 항일과 독립운동의 주축이었음을 해방 후 세대가 알아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남쪽보다 북쪽에 더 정통성이 있다는 주장과 맥이 닿는 논리이다.

하지만 정통성 논쟁은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북한 전역을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초상화와 찬양구호로 뒤덮은 세습독재국가이자, 인민을 굶겨 죽이는 ‘인권의 지옥’에 어떤 정통성이 있다는 말인가. 좌익 항일애국지사들이 지하에서 통탄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부터 사실상 국권을 상실해 40년 동안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이승만 김구 선생처럼 해외에 나가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들도 있지만 국내에서 민족을 계몽하는 교육 언론 사업, 경제의 독립을 위한 산업 활동을 한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일제에 일면 수동적(受動的)으로 협력하고, 일면 저항하면서 독립 후에 대비해 민족의 힘을 양성했다. 역사적 인물을 평가하려면 시대적 상황과 일생의 행적을 따져봐야 한다. 한때의 어쩔 수 없는 ‘수동적 협력’을 들추어내 친일로 단죄하다 보면 해방공간에서 성한 사람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1949년 반민특위도 단죄의 대상을 악질적 민족반역자 200여 명으로 국한했던 것이다.

‘민족의 힘’ 육성한 인물 평가해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중반을 산 선조들은 한일강제병합을 막지 못했고, 학교에서 매일 아침 일왕이 있다는 동쪽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 황국신민(臣民)의 선서를 외치고, 창씨개명을 하고, 신사참배를 하며 살아남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친일파’의 후예들이다. 누가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있는가.

자기들의 잣대가 절대적이라는 독선에 빠져 과거의 쓰라린 상처를 들쑤시는 것은 또 다른 편 가르기이고 후손 망신주기이다. 특히 남쪽보다 북쪽에 더 정통성이 있다는 사관(史觀)에서 나온 명단이라면 ‘대한민국 61년’에 대한 상처내기일 뿐이다.

황호택 칼럼 논설실장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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