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진녕]노무현의 거래, MB의 양보

  • 입력 2009년 8월 31일 20시 38분


선거구제 개편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실증적 사례를 놓고 보면 뚜렷이 알 수 있다.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민주당의 전신)이 각각 과반 의석을 차지한 18대 총선과 17대 총선의 투표 결과를 들여다보자.

먼저 작년 4월의 18대 총선. 한나라당은 호남권 31개 선거구 가운데 7곳에서 2위를 했다. 그러나 무소속 변수를 감안하면 의미 있는 2위 지역은 2곳에 불과했다. 정당득표율은 7.1%였다. 민주당은 영남권 68개 선거구 가운데 2곳에서 의석을 건졌고 8곳에서 2위, 3곳에서 2위와 별 차이가 없는 3위를 기록했다. 정당득표율은 8.6%였다. 한나라당 바람에다 친박(친박근혜) 바람까지 불었지만 민주당의 영남권 성적은 한나라당의 호남권 성적보다 좋았다. 한 선거구에서 2명 이상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로 바뀌거나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채택될 경우 한나라당이 호남권에서 얻는 득보다 민주당이 영남권에서 얻는 득이 상대적으로 클 것이다.

탄핵 역풍이 몰아쳤던 2004년 4월의 17대 총선 결과를 보면 그 차이가 더 확연하다. 열린우리당은 영남권에서 4석을 얻었다. 2위 선거구도 전체 68곳 중 57곳에 달했다. 정당득표율은 30.7%였다. 반면 한나라당은 호남권 31개 선거구 가운데 겨우 7곳에만 후보를 냈을 뿐이다. 게다가 2위를 한 곳조차 전무(全無)했다. 정당득표율은 0.3%에 불과했다. 앞으로도 이런 결과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17대 선거를 중대선거구제나 권역별 비례대표제로 치렀다면 열린우리당은 전체 의석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을 것이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대연정(大聯政)을 제의하면서 선거구제 개편을 조건으로 내건 것은 지역주의 타파라는 대의명분도 있었지만 열린우리당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결과를 내다봤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대통령 권력의 절반가량을 나눠주겠다고 한 것이다. 일종의 거래였다. 민주주의가 진전될수록 의회 권력이 대통령 권력 못지않게 세질 것으로 보았을 것이었다. 실제 그는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로 대통령 권한을 63일간 중단당하며 의회 권력의 무서움을 체험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거래를 거부했다. 노 대통령이 설정한 의제의 덫에 걸려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머지않아 대통령 권력을 되찾아올 가능성이 높은데 구태여 자신들의 의회 권력을 약화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로부터 4년 뒤 이번엔 이명박(MB) 대통령이 선거구제 개편을 제의했다. 하지만 그는 민주당에 아무 조건도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될 한나라당에 양보를 촉구했다. 민주당으로서는 반대급부를 지불할 필요가 없는 데다 일방적으로 득을 보게 되는 제의이니 그야말로 일거양득(一擧兩得)이다.

하지만 세상엔 공짜가 없다. 공개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MB도 나름대로 민주당에 바라는 게 있다. 의석수에서 득을 보는 대신 의회정치의 질(質)을 높여달라는 것이다. ‘고질적 문제 해결을 위한 근원적 처방’이라는 말 속에 그런 주문이 담겨 있다. 차원은 다르지만 MB도 지난 1년 반 동안 의회 권력의 위력을 실감했을 것이다. 여당 의석이 아무리 많아도 야당이 죽기 살기 식으로 나오면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을.

이것도 일종의 거래라면 거래다. MB와 민주당은 흥정이 가능할지 궁금하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