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영식]클린턴과 김만복

  • 입력 2009년 8월 7일 02시 59분


환한 웃음과 화려한 말솜씨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을 상징하는 트레이드마크다. 대통령 재임 시절은 물론이고 퇴임 후 각종 토론회나 대선후보 지원유세 등에서 보여준 그의 능수능란한 연설과 미소는 청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곤 했다.

그런 그가 전 세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북한 방문과 귀국 과정에선 굳게 침묵을 지켰다. 북한의 최고 권력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날 때도, 두 여기자와 함께 미국 밥호프 공항에 도착한 뒤에도 그랬다.

여기자 석방에 큰 공을 세웠지만 그는 억류됐던 여기자 로라 링의 감사 인사, 여기자들이 소속된 커런트TV의 공동창립자 앨 고어 전 부통령의 인사말 이후에도 침묵을 지켰다. 전 세계 시청자들의 눈과 귀가 그의 입에 쏠렸지만 그는 조용히 무대 뒤로 사라졌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그가 미국에 도착한 뒤에야 환한 웃음을 다시 보였다는 것이다.

클린턴이 누구인가. ‘지퍼 게이트’로 불린 섹스 스캔들, 이에 따른 탄핵정국에도 애써 미소를 지었던 인물이다. 그런 그가 평양에서 보인 무표정은 아마도 자신이 여기자 석방을 위한 비공식 민간사절이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식적인 표정이었을 것이다. 북한의 기대와 달리 미국 정부는 북한의 태도변화 없이는 대북 제재를 지속할 것이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담은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그는 표정과 침묵을 철저하게 계산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말을 아낀 것도 괜히 나서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함으로써 ‘개인적 방북’이라는 취지를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 얘기하기 전에 방북 결과를 미리 설명할 수 없는 절차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떻든 수다쟁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달변인 그의 무표정과 침묵, 그리고 진중한 행동은 잔잔한 감동을 남겼다. ‘정치적 쇼’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정치도 이런 감동을 줄 수 있는 쇼라면, 그리고 이를 연출할 줄 아는 진짜 ‘쇼맨’이라면 ‘멋진 정치인’이라는 칭찬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TV로 그의 모습을 보면서 2년 전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인질 사태가 끝난 뒤 김만복 전 국가정보원장이 자청해 언론과 인터뷰하고, 괴로움에 시달렸을 인질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노출을 피해야 할 국정원 현장 요원인 ‘선글라스 맨’까지 인터뷰 자리에 대동하기도 했다.

상반된 두 장면에서 침묵이 더 많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말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김영식 정치부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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