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모차르트 스콜

  • 입력 2009년 6월 25일 02시 56분


뭐랄까, 지정학적 불운이라고 해야 할까. 집과 신문사가 모두 광화문에 있는 탓에 어쩔 수 없이 광화문광장 조성공사 현장을 보게 된다. 출퇴근할 때도,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울 때도 어쩔 수 없이…. 볼 때마다 가슴 한쪽에서 알 수 없는 불안과 흉통(胸痛)이 밀려온다. 국가상징거리가 아니라 국민분열거리, 광장(廣場)이 아니라 광장(狂場)이 되고 마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을 씻을 수 없다. 그래도 볼 수밖에 없으니 분명 ‘지정학적 불운’이다.

어제 새벽엔 국민행동본부와 고엽제 전우회 회원 50여 명이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에 몰려가 ‘기습 철거 작전’을 펼쳤다고 한다. 새벽 5시 40분이었다. 국민행동본부장을 맡고 있는 서정갑이라는 사람은 오히려 경찰의 직무유기를 탓했다. 이를테면 경찰이 하지 못하는 일을 자기들이 했다는 것이다.

책에서나 읽었던 해방공간을 직접 보는 듯했다. 그때도 우파 행동대원들은 경찰을 대신해 좌파 때려잡기에 나섰다. 실은 경찰과 짜고 친 고스톱이었지만. 어제 새벽 사건도 혹시 경찰의 ‘묵인’ 아래 이뤄진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더럭 들었지만, 그런 의심까지 하면 정말 설 땅이 없을 것 같아 이내 고개를 젓고 말았다. 차라리 지금이 해방공간이었으면, 그러면 ‘그래, 지금은 21세기가 아니라 20세기 초니까…’라면서 조금은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45년째 언론 외길을 걸으며 우리 현대사의 고비 고비를 지켜본 조선일보 김대중 고문까지 ‘비명(悲鳴)’을 지르는 걸 보면 후생(後生)의 절규도 그리 뜬금없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며칠 전 오랜만에 본 ‘김대중 칼럼’은 만인(萬人) 대 만인의 싸움터가 돼버린 대한민국 현실에 절망하면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까지 인용했다. 그건 민족개조론의 드높은 외침이 아니라, 비명이었다. 김대중 칼럼에 동의할 수 없는 때도 있었지만, ‘늙은 기자’의 그 비명만큼은 오래 가슴에 남았다.

절망이 깊어지면 살짝 ‘맛’이 가는 걸까? 자정 가까운 시각의 귀갓길,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 세종문화회관 뒤 뜨락으로 접어드는데 갑자기 ‘쇼생크 탈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 앤디 듀프레인이 교도소 도서관에서 모차르트의 음반을 발견하고,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편지의 이중창’을 틀어주는 장면. 모차르트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순간, 모든 죄수는 얼어붙은 듯 동작을 멈추고 음악의 지순(至純)에 빠져든다. 평생 단 한 번도 오페라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는 죄수들이었다. 앤디의 친구 레드는 이렇게 말한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운 곡이었다. 아름다운 새가 날아와 교도소 벽을 허물어버리는 것 같았다”고. 모차르트가 흐르는 동안, 그들은 하나였다.

광화문광장에 모차르트를 틀어보면? 광장을 무대로 ‘만인 대 만인’의 전쟁을 준비하던 증오의 희생양, 이념의 포로들도 그 순간만은 정화(淨化)의 세례를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가 날아드는 것 같았다. 뜨락 장미밭의 스프링클러가 안개비를 뿌렸다. 상상이 날개를 달았다. 한국도 이제 아열대 기후라는데 아예 매일 한 차례 ‘모차르트 스콜’이 내리게 하면?

광화문광장이 개장하는 8월, 이명박 대통령은 보수·진보 진영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통합위원회를 출범시킨다고 한다.

김창혁 교육생활부장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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