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제동]한국인의 恨이란 무엇일까요

  • 입력 2009년 6월 19일 02시 56분


얼마 전 디스커버리 채널에 출연했습니다. 제가 주인공은 아니었고요, 가수 비와 배우 이병헌 씨가 세계 속 한국 대중문화의 발전을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였습니다.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다가 카메오처럼 화면에 담기게 됐습니다. 비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힘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비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을 말하며 ‘한’이라는 단어를 꺼냈습니다. 통역이 있었는데 ‘한’이라는 단어의 등장에 잠시 난감해했습니다. ‘정’도 그렇지만 ‘한’도 번역할 알맞은 영어가 없다는 거지요. 촬영이 어느 정도 끝났을 때 기자 분이 다가왔습니다. ‘한’이라는 단어에 대해 한 번 더 물어봐도 되겠느냐, 외국인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겠냐고 말이지요. 저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지요. 한반도의 5000년 역사를 꿰뚫어 온 정서를 이제 겨우 삼십몇 년 살아본 제가 어찌 정의하겠냐고. 한 100년쯤 살고 나면 알게 될까 싶다고요. 그 대신 저는 고 박경리 선생님의 말씀을 대신 전했습니다. 한국의 위대한 작가가 말씀했는데 ‘한’은 가장 과거적이며 가장 미래적인 단어라고 말입니다.

‘한’이 미래적인 단어이기도 하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이 과거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거든요.

외국인에게 설명하기 힘든 단어

왜 어릴 적 담요를 뒤집어쓰고 보던 전설의 고향에 늘 나왔지 않습니까. 살아생전 가슴에 맺힌 풀지 못한 무엇이 있어서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밤마다 나타나 사람을 괴롭히는 귀신, 물에 젖은 소복을 입고 한이 서린 눈으로 사또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처녀귀신의 모습은 정말이지 무서웠지요.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저는 학창시절 국어시간이며 음악시간에 들었던 ‘우리나라의 정서는 한이다’라는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리랑의 가사도 좀 의아했지요.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게 쿨하게 행복을 빌어주지는 못할망정 떠나는 뒷모습에다 대고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나 나라니, 그건 못된 심보가 아닌가 싶었던 거지요. 그런 모든 제 의구심은 제가 한을 과거에만 국한된 정서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든 것이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어린 시절 가난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한 어머니가 자식만큼은 가르치고 싶다는 열망으로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농사일을 합니다. 이를 ‘과거에 배우지 못한 응어리’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맺힌 것을 그냥 껴안고 살기만 한다면 응어리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은 풀어내고자 오늘을 열심히 살아 내일을 준비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를 사랑했던 사람이 떠나갑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를 떠나고 가면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김소월 님의 시처럼 그 사람이 가는 길마다 ‘꽃잎을 뿌려드리올’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잊겠지요. 그 사람이 십리도 가기 전에 아리랑 아리랑 뜻 없는 곡조를 부르며 슬픔을 털어낼 준비를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내가 뿌린 꽃잎을 밟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그 사람에게 더는 해줄 수 없음을 알고 내 갈 길을 준비할 겁니다. 아리랑과 진달래꽃, 서로 다른 가사가 같은 ‘한’이라는 정서를 담고 있음을 뒤늦게 이해했습니다.

‘한’이 무엇인지 저는 기자 분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언어문제뿐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어쩌면 한국인의 ‘한’이란 우리만 아는 단어입니다. 말의 정의 역시 우리가 만들어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저는 한을 그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과거에 발목 잡힌 무엇이 아니다, 과거에 끝내지 못한 것이 현재를 살아갈 힘을 주며 원하는 미래로 이끌어주는 동력이 되어준다는 아주 오묘한 무엇이다.

오늘을 지탱하고 내일로 이끄는 힘

비는 그렇게 이야기했던 것 같습니다. 가슴에 한이 있다고. 그것으로 인해 힘든 줄 모르고 달려온 것 같다고. 비를 보면 늘 자랑스럽지만 옆에서 지켜보는 형의 입장으로는 걱정스러울 때가 있었습니다. 저렇게까지 치열하게 매순간을 살다가 어느 순간 지쳐버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었습니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비의 가슴에는 뜨거운 ‘한’이 있으니까요. 그것이 오늘 달리게 하고 더 큰 미래로 끌어줄 테니까 말입니다. 제 가슴에는 어떤 한이 있을까요. 저를 지탱해주고 앞으로 살고 싶은 미래의 모습으로 힘차게 끌어줄 과거의 그것은 무엇일까요. 몇 가지 생각이 떠오르네요.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김제동 방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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