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동원]카자흐스탄 대리기사가 뜬 이유

  • 입력 2009년 6월 17일 03시 00분


“30분 뒤 대리운전 출발합시다.”

뜻밖이었다. 이곳은 카자흐스탄의 경제중심지 알마티. 서울로 착각할 뻔했다.

현지에서 사업하는 몇몇 분과 늦은 저녁을 하고 있었다. 밤 12시가 가까워 오자 일행 중 한 분이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한국말로 대리운전 기사를 부르는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농담이냐”고 묻자 흥미로운 말이 쏟아졌다.

원래 카자흐스탄에는 ‘대리운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이곳에 한국인 전용 대리기사가 등장한 건 3년 전쯤. 음주단속도 문제지만 한국인들이 저녁에 술이라도 한잔하면 가뜩이나 지리에 밝지도 않아 운전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이때 일명 ‘미스터 카레야(한국을 뜻하는 현지어)’가 등장했다. 카자흐스탄 사람인 그가 알마티의 한국사업가 1000여 명에게 ‘안전귀가’를 보장한다며 대리운전을 해 주겠다고 나선 것. 당초엔 중고차 한 대로 호객 택시영업을 하던 사람이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면허를 받지 않고 호객영업을 하는 차가 정규택시보다 많다. 호객영업의 돈벌이는 시원치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다. 술자리를 마친 한국인이 “집까지 운전을 대신 해줄 수 있느냐”며 “택시요금의 세 배를 주겠다”고 말했다. 그것이 계기였다.

이런 일이 서너 번 반복되자 “한국인 대상으로 대리운전만 해도 돈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한국인 단체를 돌며 대리운전 안내문과 명함을 집중적으로 돌렸다.

한국 비즈니스맨들이 싫어할 리가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부인들이 더 반겼다는 점. 늘 안전귀가가 걱정됐는데 아무리 늦어도 안전하게 집까지 ‘모셔다’ 주는 대리기사를 반색했다. 웬만한 한국말도 척척 할 줄 알 뿐 아니라 단골 고객의 집까지 훤히 꿰뚫고 있어 고객 입장에서 오히려 고마운 느낌까지 받는단다.

요금은 2000텡게(약 1만5000원) 정도로 택시비의 2배. 이용자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만큼 요금을 책정한 것도 손님이 이어지게 만든 요인이다.

요즘은 10여 명의 고용기사를 거느릴 만큼 기반을 닦았다. 한 교민은 “한국 대리운전업체 오너가 얼마 전 현지조사를 하고 갈 만큼 관심을 끌고 있다”고 귀띔했다. 이쯤 되면 기자 시각으로 볼 때 고객 영역을 넓혀 안전귀가에 관한 한 ‘Almighty(전능) in Almaty’라는 슬로건을 내걸어도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객의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이를 ‘틈새시장’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뉴비즈니스의 핵심이다. 사업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카자흐스탄 대리기사의 행보를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진그룹도 처음엔 트럭 몇 대로 시작하지 않았던가.

송상호 경희대 교수(경영학)는 “한때 유행했던 블루오션 이론도 따지고 보면 고객의 욕구를 연구해 경쟁자가 없는 시장을 찾아내는 것이 포인트”라며 “두 가지를 충족했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경영전략의 사례”라고 평했다.

현지 한국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간파한 데다 안전귀가 보장, 적절한 요금으로 고객에게 신뢰를 줘 틈새시장을 창출한 점은 한국 기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듯싶다. 세계 경제가 깊은 골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럴수록 ‘뻔한 시장’보다 ‘안 보이는 틈새시장’을 찾아나서야 할 때다. “굿 럭(Luck)! 미스터 카레야.” ―알마티에서

김동원 국제부 차장 davis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