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원재]기업 구조조정 뜬소문 없애려면

  • 입력 2009년 6월 4일 02시 59분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대우건설 인수로 자금사정이 어려워졌다는 것은 재계와 금융계에서 웬만큼 알려진 얘기다. 동부그룹이 반도체 투자에 의욕을 보였다가 시황 악화로 고전한다는 것도 오래전부터 시장에 떠돌아다닌 구문(舊聞)이다. 45개 그룹에 대한 채권단의 재무평가에서 두 그룹이 강제성을 띤 재무구조개선약정(MOU) 체결 대상이 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공개된 공간에서 두 그룹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금융당국이 기업 명단의 비공개를 원칙으로 정하고 언론에도 협조를 부탁했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유동성 문제만 해결하면 정상화가 가능한데, 이름이 알려지면 다른 계열사까지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채권단 관계자들은 사석에선 해당 기업을 놓고 이런저런 걱정을 쏟아냈지만 공식 석상에서는 입을 다물었다. 언론도 ‘대형 인수합병(M&A)으로 고전하는 A그룹’, ‘철강 계열사를 매물로 내놓는 B그룹’ 하는 식으로만 기사를 다뤘을 뿐 실명은 적시하지 않았다.

지난달 31일까지인 MOU 시한이 지나자마자 구조조정 대상에 오른 9개 그룹의 실체는 슬금슬금 드러났다. 금호는 7월 말까지 대우건설 풋백옵션 문제를 풀 새로운 투자자를 찾기로 했고 동부는 동부메탈 같은 알짜 계열사를 내놓기로 했다. 명단 공개에 따른 후폭풍은 없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을 접할 방법이 없었던 투자자만 정보에서 소외된 셈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친 뒤 채권단이 크고 작은 기업 구조조정에 나설 때마다 명단 공개는 어김없이 논란이 됐다. 시장의 불확실성을 해소하려면 어떤 기업이 구조조정 대상인지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는 명분론과 기업 신뢰에 치명적 타격을 입히고 시장 혼란을 키울 수 있으므로 익명으로 해야 한다는 현실론이 충돌했다. 당국의 대응은 좋게 보면 유연했고, 나쁘게 보면 들쭉날쭉했다. 비공개를 택한 적도 있고, 태도를 바꿔 명단을 발표하기도 했다.

작년 11월 100대 건설사를 상대로 대주단 협약 가입을 독려하면서 채권단은 명단을 비밀로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년간 채무상환을 유예하고 신규자금 지원도 해주는 조건이지만 기업들이 가입을 꺼리자 한 발 물러선 것이다. 올해 초 중대형 건설사와 조선사를 상대로 한 1차 신용위험평가에서는 C등급을 받아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14곳과 퇴출 대상(D등급)인 2곳의 명단을 발표했다. 시장은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였고, 대다수 기업의 워크아웃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명단을 비공개로 할 때는 근거 없는 ‘살생부 리스트’가 관련 업계에 유포돼 멀쩡한 회사까지 홍역을 치렀다. 대주단 협약 때는 거의 모든 건설업체가 부실기업 취급을 받았고, 45개 그룹의 재무평가 때도 몇몇 중견그룹이 악성 루머에 시달렸다.

이달에는 430개 개별 대기업의 신용위험평가 결과가 나온다. 기업의 수로 보나 크기로 보나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시장은 제한된 정보를 갖고 상상하고 추측하면서 탈락 기업의 면면을 가늠해보려 할 것이다.

현 정부의 기업 구조조정은 속도 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렇다면 투명성에서라도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시장은 관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현명하다’는 평범한 진리는 뜬소문을 없앨 수 있는 묘책이 가까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박원재 경제부장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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