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61>

  • 입력 2009년 3월 31일 14시 33분


아우라(Aura)!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기술 복제시대와 함께 예술품의 아우라가 사라졌다고 선언했다. 아우라가 사라진 것은 예술품뿐만이 아니다. 오리지널보다 더 오리지널한 연기를 펼치는 디지털 액터(Digital Actor)가 등장한 후 휴먼 액터들의 효용가치도 예전 같지 않았다. 디지털 액터는 입지도 먹지도 않았고 지치지도 않았으며 병에 걸리는 일도 없었다. 엄청난 출연료를 받던 배우들은 하나둘 아날로그 연극 무대로 활동의 장을 옮겼다. 세탁기가 빨래판을 없애고 디지털 음원이 아날로그 LP판을 사라지게 했듯이, 피가 흐르는 휴먼 액터들도 곧 도태될 운명이었다.

앨리스의 생일을 다시 한 번 축하하고 헤어진 석범은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집이나 보안청과는 정반대 방향이었다. 20분을 달리자 조명을 훤하게 밝힌 언덕이 드러났다. 샛길로 빠져 차를 세운 석범은 나무 계단을 처음엔 둘 씩 그 다음엔 셋 혹은 넷 씩 성큼성큼 건너뛰며 올랐다. 마음이 급한지 후웃후우웃 입으로 소리를 내며 숨을 뱉었다.

"누구십니까? 스태프 외엔 출입 금지란 팻말 입구에서 보셨죠? 촬영에 방해가 되니 내려가십시오."

갓 스물을 넘겼을까. 야구 모자를 거꾸로 쓴 민소매 사내가 막아섰다. 석범이 청년의 어깨를 잡아끌며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속삭였다.

"왕할매는 오늘도 밤샘 작업인가?"

'왕할매'란 소리를 듣자, 청년의 딱딱한 얼굴도 풀어졌다.

"늘 그렇죠 머. 황소고집을 누가 꺾겠어요. 일할 땐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는 건 아시죠?"

연이은 밤샘 촬영으로 졸린 눈을 비비기까지 했다.

"좋은 정보를 하나 주겠네. 왕할매에게 가서 '스톤 타이거'가 왔다고 전해줘. 그리고 곧장 침낭으로 기어들어가서 한 시간 쯤 눈을 붙이도록 하게. 그 동안엔 촬영이 없을 테니까."

"정말이십니까?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청년이 팔뚝을 긁으며 뒤돌아서서 달려갔다. 석범은 아름드리 소나무를 양팔로 후려치는 시늉을 했다.

스톤 타이거!

어린 시절 석범은 이 별명을 아꼈다. 석범은 왕고모에게서-그때만 해도 그는 그녀를 고모라고 불렀다- 스톤 타이거 다섯 글자를 듣자마자, 그 이름이 좋아서 펄쩍 펄쩍 뛰었다.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특별시를 떠난 후론 왕고모를 만나지 못했다. 그 사이 왕고모는 나이를 먹었고 드라마 업계에서는 '왕할매'로 통했다. '무서운', '고집불통' 등의 단어들이 그녀를 수식했다.

"헤이, 스톤 타이거!"

왕할매 이윤정이 양팔을 활짝 펴고 나아와선 석범을 가볍게 포옹했다. 작은 키, 삐쩍 마른 몸, 일흔 살을 훌쩍 넘긴 나이였지만 끌어안은 손힘은 여전히 좋았다. 그녀는 100살까지 현장에 있겠노라 큰 소리를 쳤다. <태릉선수촌>부터 <커피프린스 1호점>, <트리플>을 지나 현재 촬영 중인 <산악자전거>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디지털 액터를 배제하고 100퍼센트 휴먼 액터로만 드라마를 찍는 유일한 연출자였다.

윤정이 백발을 찰랑이며 앞장을 섰고, 석범은 흘끔 시끄러운 촬영 현장을 쳐다본 후 숲길로 접어들었다. 나뭇잎에 조명이 가려 어둠이 어둠다운 곳에 이르렀을 때 윤정이 걸음을 멈췄다.

"미주가…… 많이 좋지 않아."

"왕고모! 아직도 자연인 그룹 끄나풀 노릇을 하십니까?"

석범의 아버지 은기영은 윤정을 친누나처럼 따랐다. 함께 경주에서 이스탄불까지 실크로드를 자전거로 완주한 적도 있었다. 석범은 그녀를 왕고모라고 불렀고, 그녀는 석범을 스톤 타이거라며 귀여워했다. 윤정은 '자연인을 아끼는 사람들' 멤버이기도 했다.

석범의 물음에 날이 서렸다. 윤정이 천천히 턱을 들고 석범을 노려보았다. 작지만 단단한 기운이 석범의 이마에 닿았다.

"변변찮은 놈! 호랑인 줄 알았더니 덜 자란 도둑고양이로구나. 헛똑똑이야. 아직도 엄마를 원망하는 게냐? 네 나이도 이제 서른이 넘었는데, 엄마의 삶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게야? 엄만 죽기 전에 널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어 해. 두 손 꼭 잡고 유언이라도 하려는 거겠지."

"원망 따윈 없습니다. 다만 손미주 여사는 지금 특별시연합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고 있습니다. 제가 손 여사를 만난다면, 지명수배자인 그녀를 체포할 수밖에 없습니다."

"뭐? 체포?"

윤정의 손바닥이 석범의 뺨을 맵게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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