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허승호]오쿤의 ‘복지 양동이’가 샐지라도…

  • 입력 2009년 3월 18일 03시 00분


갑돌이와 갑순이가 사막에서 헤어져 각자 헤매고 있다. 갑돌이는 다행히 작은 오아시스를 발견했지만 갑순이에겐 물이 없다. 지켜보던 신(神)이 ‘오아시스의 물을 한 양동이 퍼 갑순이에게 갖다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문제는 신의 양동이가 줄줄 새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갑돌이는 고소득층, 갑순이는 극빈층, 신은 정부다. ‘오쿤의 새는 양동이(Okun's leaky bucket)’라 불리는 이 비유는 미국의 경제학자 아서 오쿤의 저서 ‘평등과 효율’(1975년)에서 비롯됐다.

정부 복지지출은 새기 마련

정부의 양동이는 새기 마련이다. 간혹 엉뚱한 사람이 복지혜택을 누린다. “복지에 기생해 살겠다”는 사람도 생겨난다. 후진국에서는 행정 불투명과 관료의 부패까지 끼어든다. 모두 누수(협의)다. 넓게 보자. 제도를 만들고, 세금을 걷고, 복지수요를 파악해 나눠주는 공무원의 봉급도 결국 복지재정에서 나간다. 공무원들이 양동이 물을 갑순이와 나눠 마시는 것. 이 또한 누수(광의)다.

요즘 복지전달체계가 이슈로 떠올랐다. 금융위기로 새로운 빈곤층이 늘어나고 복지재정도 함께 커지면서 ‘이 돈이 정확하게 표적에 전달되는지’에 대한 관심도 커진 것이다. 이 와중에 서울 양천구 용산구, 부산, 전남 해남군, 경기 양평군 등 곳곳에서 복지공무원들이 빈곤층에 줄 돈을 빼돌리다 적발됐다. 호화생활을 한 사례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판국이니 복지지출을 줄이자”고 한다면 잘못된 접근이다. 한국의 복지는 아직도 너무 취약하다. 1인당 소득 1만5000달러 시점에서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지출을 비교해보면 북유럽이 25%, 서유럽은 22%다. 선진국 중에서 가장 낮은 미국도 15%이지만 한국은 7%다.

복지전달체계를 보강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사실 우리 예산당국은 복지사업비는 쉽게 늘려주면서 복지인프라를 정비하는 일에는 인색했다. 복지공무원 1인당 복지대상자 수는 1300여 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10배가량이다. 손은 모자라는데 복지서비스의 종류는 100개에 이르는 등 지나치게 복잡해졌다. 효율적으로 관리될 리 없다. 양동이의 구멍을 때워야 한다. 이 돈을 아끼다가는 더 많은 돈이 샌다. 결국 갑돌이-갑순이-신 모두가 불행해진다.

하긴 외국에서도 복지전달체계는 늘 문제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1976년 공화당의 대선후보 경선에서 ‘복지 여왕(welfare queen)’을 거론하며 민주당의 복지 확대를 맹비난했다. 복지 여왕이란 수십 명의 가공인물 이름으로 저소득층 식량쿠폰을 받아 넉넉하게 생활하면서 캐딜락까지 끌고 다니는 여인. 복지누수의 대명사다.

사회안전망 문제에서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약간의 낭비’는 감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쿤은 물었다.

“당신은 누수를 얼마까지 용인할 수 있겠는가? 10%, 50%, 75%? 경우에 따라선 99%?”

합리적인 정부라면 갑돌이의 오아시스는 넉넉한지, 갑순이의 갈증은 얼마나 심한지, 양동이는 얼마나 튼실한지 등을 두루 살펴 담는 물의 양을 결정할 것이다. 만약 많이 샌다면 그 양동이는 쓰기가 꺼려질 것이다. 하지만 갑순이가 단지 갈증을 느끼는 상태가 아니라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다면… 설혹 양동이에 상당히 문제가 있다 해도 물을 담기 시작할 것이다. 오쿤이 ‘누수율 99%’라는 극단적 답안까지 제시한 데는 이런 함의가 있다.

누수 너무 죄면 극빈층에 피해

취약한 복지인프라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의 누수는 심각한 편이 아니다. 선진국에선 누수율(협의)을 5∼10%로 본다. 5%까지는 용인 가능하며, 더 낮추려 하다가는 감시비용이 더 든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2∼3%로 추정된다. 선량한 공무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까닭일 게다.

회남자(淮南子)에 이르기를 그물로 새를 잡을 때 새는 그물 한 코에 걸려 잡힌다. 그렇지만 그물을 한 코만 쳐서는 새를 잡을 수 없다. 사회안전의 그물도 마찬가지다. 복지는 우리 마음의 너그러움에 기초하고 있다. 만약 ‘한 방울의 누수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복지파이프를 죄면 극빈계층은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리고 만다.

허승호 편집국 부국장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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