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원재]한국 國有은행의 성적표

  • 입력 2009년 3월 5일 02시 58분


세계 최대 은행인 씨티은행의 국유화로 전 세계 금융시장이 소란스럽다. 미국 재무부는 작년에 450억 달러의 공적자금을 쏟아부었는데도 부실이 줄어들지 않자 국유화라는 극약처방을 택했다. 다급한 마음에 결행은 했지만 잘한 선택이라고 자신하지는 못한다. 일단 기존 경영진을 유임시켰지만 사상 초유의 사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난감해하는 눈치다.

은행 국유화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낳은 새로운 풍속도다. 영국 프랑스 독일 스웨덴 등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영업하던 민간은행들이 속속 정부의 우산 아래로 들어가고 있다.

우리에겐 낯선 모델이 아니다. 한국 정부는 1998년과 2000년 두 차례에 걸쳐 우리은행의 전신인 한빛은행에 약 8조 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소유권을 차지했다. 한국 금융의 후진성을 드러낸 사례라는 비아냥도 있었지만, 그때는 지금의 미국처럼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상황이 절박했다.

한국형 국유은행의 새 주인은 의외로 절제의 미덕을 보였다. 우리금융그룹의 회장과 우리은행장 자리를 선뜻 민간에 넘겼다. 1기의 윤병철(회장)-이덕훈 씨(행장) 콤비와 2기의 황영기 씨(회장 행장 겸임)는 민간에서 성장한 금융 전문가였다. 3기 회장은 관료 출신인 박병원 씨가 맡았지만 야전지휘관 격인 행장은 민간에서 잔뼈가 굵은 박해춘 씨의 몫이었다.

관치금융의 뿌리가 깊은 한국에서 관료들이 민간에 멍석을 깔아주고 뒷전으로 물러앉은 것은 이례적이다. 여론을 의식한 측면도 있지만 경영정상화를 통한 공적자금 조기 회수라는 대의 앞에서 자신들이 나설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현 정부에서는 대표적인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장에도 민간 출신이 발탁됐다.

경영진 구성의 취지는 나무랄 데 없어도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자산 규모에서는 메이저 은행의 지위를 굳건히 다졌지만 이익 구조는 오히려 취약해졌다. 경기가 좋을 때 덩치 키우기에 집착한 후유증은 금융위기가 닥치자 곧바로 은행의 수익성에 타격을 가했다. 우리은행은 리스크 관리 실패로 작년 4분기에만 6911억 원의 적자를 냈다. 넓은 의미의 주인인 국민을 흐뭇하게 하는 ‘어닝 서프라이즈’는 고사하고 ‘어닝 쇼크’로 투자자들의 상처만 키웠다.

민간에 있을 때는 일 좀 한다는 소리를 듣던 전문가가 정부가 오너인 금융회사로 옮긴 뒤 초라한 실적을 거둔 데는 관료 집단의 질시나 보이지 않는 견제 탓도 있을 것이다. 최고경영자(CEO)를 고르는 임명권자의 안목에 문제가 있어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적인 이유는 민간의 실력 부족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포장은 그럴듯하지만 내공을 갖춘 전문가의 인력풀이 빈약한 한국 금융의 현실을 반영한 결과다. 민간의 좌절이 되풀이된다면 은인자중(隱忍自重)하던 관(官)이 슬그머니 태도를 바꿔 언제 다시 전면에 등장할지 모를 일이다. 국책은행과 국유은행에서 민간 출신 CEO들의 성공 사례가 나오지 않으면 한국 금융의 선진화는 요원해진다.

은행 국유화는 한국이 외환위기의 충격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과정에서 경험한 소중한 자산이다. 한국은 10년 가까운 세월을 이 모델과 씨름했지만 남에게 성공 노하우를 가르쳐줄 만큼의 성취는 거두지 못했다. 나중에 미국 씨티은행을 찾아 국유은행을 경영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그런 일만은 없었으면 한다.

박원재 경제부장 parkwj@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