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힐러리는 왜 대통령이 못됐을까

  • 입력 2009년 2월 19일 20시 04분


어제 방한한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작년 이맘때만 해도 첫 여성대통령을 내다봤던 인물이다. “새벽 3시 백악관에 비상전화가 울린다면…” 같은 선거광고는 ‘애송이’ 버락 오바마에게 미국을 맡겨도 될까 싶을 만큼 위력적이었다. 오바마 외교정책을 “순진하다”고 몰아붙였던 힐러리가 국무장관 청문회를 통과하기 위해 오바마의 정책보고서 수천 쪽을 달달 외우고, 오바마 ‘스마트 파워’의 전도사가 되리라고 상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여성적 리더십과 섹시즘

대통령 부인 경력 8년간 쌓은 노련함에다 외모, 능력, 당당함까지 갖춘 힐러리는 그러나 당내 경선에서 오바마의 벽을 넘지 못했다. 패인은 상대가 오바마라는 뜻밖의 강적이었다는 점을 먼저 꼽아야 할 거다. 흔히 여성적 리더십으로 일컬어지는 감성·소통·통합의 소프트파워는 오히려 오바마의 장기였다. 그가 내건 ‘변화’에 대한 미국민의 욕구를 과소평가한 힐러리의 오만도 패인이다. 선거전략 실패, 참모들의 불화, 남편 빌 클린턴까지 갈등에 합세한 것 등이 겹겹이 이어졌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힐러리 자신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까지가 모범답안이라고 한다면, 또 다른 패인으로 참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힐러리는 여성이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섹시즘(sexism)의 벽이다. 여성 무시, 또는 남성우월주의로 번역되는 섹시즘은 미국 대선 내내 작용했다. 여성단체들의 주장은 덮어놓고라도 민주당 경선이 끝난 뒤 뉴욕타임스가 “기사 보도에서 섹시즘이 없었다고 하기 어렵다”고 인정했을 정도다. 케이블 뉴스채널 MSNBC의 진행자 크리스 매슈스는 힐러리를 “마녀”라고 했고, 터커 칼슨은 “힐러리가 TV에 나오면 저절로 다리를 꼬게 된다”고 했다. 너무나 공격적으로 하드파워를 휘둘러서 ‘남자 잡아먹는 여자’처럼 느껴졌다는 의미다.

힐러리 자신도 강한 리더로 보이려 하면서도 끊임없이 여성유권자에게 구애했고, “여자라서 차별받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섹시즘은 있다. 하지만 힐러리는 여자라서 덕 본 점도 있지 않나. 나는 매일 섹시즘을 겪지만 거기 신경 쓸 시간이 없다”는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과 대조적이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로자베스 모스 캔터 교수는 “좋은 여자이자 훌륭한 리더로 평가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했다. 한마디로, 유능한 여자는 밥맛없다. 그러나 착한 여자는 리더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 그렇다면? 노스웨스턴대 사회심리학교수 앨리스 이글리가 전략을 내놨다. 리더가 되고 싶은 여성이라면 먼저 착한 모습으로 두루 호감을 산 뒤에 유능함을 드러내야 힐러리처럼 당하지 않는다는 거다. 독일의 첫 여성총리 앙겔라 메르켈이 젊은 날 멘터였던 헬무트 콜에게 ‘소녀’로 불렸다가 종국엔 그를 몰아내고 기민당 총재가 된 것이 살아 있는 예다.

미국보다 대통령선거 문화가 발달했다고 하기 힘든 우리나라에서 섹시즘이 난무하지 않았던 건 뜻밖에 자랑스러운 일이다. 우리의 첫 여성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던 박근혜에게 다른 반대론은 있었어도 ‘여자여서 안 된다’는 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는 한나라당이 침몰 직전에 빠졌을 때 구국의 성녀처럼 떨쳐 일어났고, 자신에 대한 국민의 애정을 무기로 대통령후보 경선만 빼고는 선거마다 바람몰이에 성공했다.

박근혜의 능력을 보고 싶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지난해 쇠고기 시위로 나라가 흔들릴 때 박근혜는 허무맹랑한 광우병 논란을 잠재우기는커녕 “재협상밖에 해법이 없다면 재협상이라도 해야 한다”며 정부를 비판했다. 올 들어 야당이 국정의 발목을 잡고 있을 때도 “쟁점 법안은 정부 야당 국민 간 관점의 괴리가 크다”고 정치평론가처럼 말할 뿐, 괴리를 좁히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여자 하나’(섹시즘이 들어간 표현) 끌어안지 못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잘못이 더 크다. 그러고도 전 국민과 소통하겠다니 신뢰가 떨어진다.

하지만 박근혜가 지금 보여주지 못하는 통합적 리더십을 대통령이 된 뒤에 보여주리라고 믿기는 어렵다. 이 정부가 망해야 자신에게 기회가 온다고 계산한다면 ‘좁은 소견’이다. 국민이 더 지쳐 정부여당과 우파에 완전히 등을 돌리기 전에, 박근혜는 대통령을 할 만한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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