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원재]나쁜 관치, 좋은 관치

  • 입력 2009년 2월 9일 02시 59분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가 옛 재정경제원 금융정책실장이던 1997년은 관치금융이 횡행했던 시절이다. 은행들은 대출 압력과 인사 청탁에 시도 때도 없이 시달렸다. 왜곡된 자금배분이 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치명적으로 떨어뜨렸다. 은행은 심사 기능을 써먹을 기회도, 심사 역량을 키울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돈을 빌린 기업들은 큼지막한 리베이트를 건넸다. 정치권과 일부 관료, 은행 경영진이 공모(共謀)의 대가를 나누며 흥청망청했다.

윤 후보자는 6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자본확충펀드 투입 계획을 설명하면서 “정부 개입을 최소화해 (금융회사) 경영의 독자성을 살리겠다”며 관치금융을 할 의도가 없다고 강조했다. 관치금융의 폐해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확실히 정리하려는 뜻일 것이다. 그가 청문회에서 밝힌 경제운용 방향엔 공감하는 바가 많았지만 이 대목에서는 솔직히 아쉬웠다. “시장의 실패를 바로잡을 수만 있다면 관치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강단을 보여주길 바랐다.

돈을 아무리 풀어도 실수요자인 기업과 가계에 돈이 돌지 않는 ‘돈맥 경화’는 전형적인 시장의 실패다. 기업 구조조정처럼 난도 높은 숙제를 은행에 떠넘기고 당국은 뒤로 물러앉은 것이 단추를 잘못 끼운 출발점이다. 겉으론 채권단 자율을 내세웠지만 속내는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보신주의의 혐의가 짙다. 이런 의도를 간파하지 못할 정도로 감각이 무딘 은행장은 없다.

당국이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에 연연하지 말고 중소기업 대출을 늘리라고 독려해도 은행은 움직이지 않았다. 금융감독원이 소집한 회의에서는 고개를 끄덕여도 돌아서서는 대출을 회수하고 남아도는 돈을 떼일 염려가 없는 단기상품으로 굴렸다.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당국자들은 빠질 것이 뻔한데 자신들만 총대를 멜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기업들은 은행이 너무한다고 불만이지만 은행은 정부를 믿지 못한다. 자본확충펀드에 덜커덕 가입해 지원을 받으면 당국이 이를 빌미로 간섭할 것이라고 의심한다. 인심 좋게 뭉칫돈을 빌려줬다가 BIS비율이 떨어지면 돈줄을 조여 통계치를 높인 라이벌 은행에 먹히지 않을까 걱정한다. 기업 구조조정으로 옥석(玉石)을 가려야 할 필요성엔 공감하지만 거래 기업을 원칙대로 퇴출시키면 부실여신이 갑자기 늘어 건전성이 나빠지기 때문에 웬만하면 안고 가려고 한다.

관료들은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누구도 나서지 않는다. 관치금융이란 낙인이 신경 쓰일뿐더러 잘못되기라도 하면 책임을 뒤집어써야 하기 때문이다. 한 전직 관료는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지금은 관(官)의 리더십은 고사하고 관료의 책임 회피가 가뜩이나 취약한 경제 시스템에 짐이 되고 있는 형국이다.

시장에서 생긴 문제는 시장이 스스로 푸는 게 최선이지만, 시장이 작동하지 않을 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정부의 고유권한이자 의무다. 구조조정의 속도를 내려면 출범 한 달도 안돼 유명무실해진 채권금융기관조정위원회를 정부와 민간이 함께 참여하는 독립적인 기구로 격상시켜 구조조정의 전권을 주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윤 후보자는 “유능한 심판은 휘슬을 자주 불지 않는다”고 말했다. 선수들이 뛸 생각은 않고 자기편끼리 공만 돌리고 있는데도 심판이 보고만 있다면 관객은 어떤 평가를 내릴까.

박원재 경제부장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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