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신치영]美대출확대 정책의 악몽

  • 입력 2009년 2월 9일 02시 59분


요즘 금융위기 진앙인 미국에선 중소기업, 자영업자, 일반인 등 금융시장의 상대적 약자들이 위기의 여파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전 세계 신문의 머리기사를 장식했던 증시 폭락, 자금시장의 금리 폭등, 은행 간의 자금거래 중단 등의 위기 현상은 어느 정도 진정되고 있다. 하지만 소매금융 시장의 문턱은 금융위기 이전보다 더 높아졌다. 돈이 필요한 일반인이나 중소기업은 대출을 받을 수가 없다며 아우성이다.

뉴욕의 주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한 지인은 얼마 전 미국 은행으로부터 2만 달러의 신용대출을 받았다. 은행돈을 빌려 쓰고 있다가 달러당 원화 환율이 좀 떨어지면(원화가치 상승) 한국에서 원화로 받고 있는 월급을 끌어다가 갚겠다는 계산이었다. 매우 상식적이고 경제적인 판단이지만 문제는 지금 당장 대출금리가 연 8%를 넘는다는 점이다. 미국 중앙은행(FRB·연방준비제도이사회)이 돈이 돌 수 있도록 사상 처음으로 금리를 제로(0) 수준으로 낮췄지만 대출금리는 위기 이전보다 높은 수준이다.

그나마 높은 금리를 물고서라도 대출을 받을 수 있으면 나은 편이다. 대부분의 은행은 대출을 억제하고 신용카드 사용한도도 줄이고 있다. 뉴욕의 한 은행 지점 관계자는 “작년 한 해 동안 일반인에 대한 신용대출이 1억3000만 달러 나갔는데 올해에는 1월 한 달간 50만 달러에도 못 미친다”고 말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행정부, 정치권 인사들이 은행권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대출에 나서지 않는 은행에는 자금을 지원해줄 수 없고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자금이 대출 재원으로 사용되는지 점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경기회복을 위해서는 소비가 늘고 공장이 돌아가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돈이 돌아야 하는데 은행들이 돈 떼일 걱정만 하고 있으니 미 정부로서는 답답한 노릇일 것이다.

정부 지원으로 부실자산을 털어내고 자본을 늘려야 하는 은행으로서는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오죽하면 미국 최대 상업은행 중 한 곳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가 며칠 전 주요 일간지에 “우리는 대출에 적극 나서고 있다”는 요지의 전면 광고를 냈을까.

서민 중산층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정치적인 명분에는 합당한 일인지 모르지만 경제적으로 옳은 선택은 아닌 듯하다.

미국이 촉발한 금융위기의 단초는 과잉대출이었다. 미국인들은 저금리 자금을 빌려 앞 다투어 집을 장만했고 모기지(주택담보대출) 회사는 돈 갚을 능력이 있는지도 보지 않고 신용도가 낮은 사람에게는 높은 금리를 받고 비우량 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을 해줬다. 부동산 버블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사람이 급증했고, 이런 대출을 기초로 발행된 유가증권에 투자한 금융회사의 손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지금은 상황이 어떤가. 집값 하락세는 멈추지 않고 있고 부실 대출은 아직도 늘어나고 있다. 경기침체가 심화되면서 일자리를 잃거나 소득이 줄고 있는 사람은 갈수록 늘고 있다. 매출이 줄면서 문을 닫거나 ‘폭탄세일’에 나서는 상점도 즐비하다.

돈을 빌려다 쓴 사람들의 빚 상환 능력은 더 떨어지고 있는데 정치권의 압력으로 은행이 대출을 늘린다면 부실 대출 증가로 이어질 것이 분명하다. 전문가들은 대출 압력이 또 다른 금융위기의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우려한다. 미국이 또다시 금융위기를 겪는다면 이는 세계 경제에 커다란 재앙이 될 것이다.

신치영 뉴욕 특파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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