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고 싶은데 다른 이유가 있냐?

  • 입력 2009년 2월 2일 10시 54분


연쇄살인 사건 피의자 강호순 씨. 오른쪽은 2004년경 충남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
연쇄살인 사건 피의자 강호순 씨. 오른쪽은 2004년경 충남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
살인의 7단계로 본 연쇄살인범의 심리는?

"성폭행을 하려던 것도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단지 죽이고 싶은 충동 때문이었다."

경기 서남부 부녀자 연쇄살인 피의자 강호순(39)은 범행동기를 묻는 경찰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강이 7명의 부녀자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것이 단지 살인을 위한 살인이었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조사 과정에서 '죽이고 싶은데 다른 이유가 있냐'고 반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의 경우처럼 연쇄살인범들은 살인 자체에 중독되는 성향을 보인다. 심지어 살인행위 자체를 본인들의 '심리적 생존'을 확인시켜 주는 일종의 의식으로 여겨 희생자를 선택해 납치하고 시체를 처리하기까지 각각의 단계마다 의미를 부여한다. 때문에 연쇄 살인은 우발적인 살인과는 동기부터 범행 수법까지 완전히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연쇄살인범이 반드시 사이코패스인 것도 아니다.

이 같은 사실은 범죄전문가인 스티븐 홈즈(Stephen T. Holmes) 전 미국 사법정책연구소 교수이자 현 센트럴플로리다대 교수와 로널드 홈즈(Ronald M. Holmes) 루이스빌대 교수가 미국 연쇄살인범 400명 인터뷰를 통해 밝혀낸 것이다. 이들은 연쇄 살인의 과정을 7단계로 분류하고 각각의 심리 상태를 분석한 '연쇄살인(Serial Murder)'라는 책을 펴냈다. 이들의 이론을 보면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에 이르는 연쇄살인범들이 살인에 대한 죄의식을 갖고 있는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평범한 이웃에서 잔혹한 살인범으로 갑자기 돌변하는 이유가 어느 정도 설명된다.

▼ 1단계 - 심리적 전조기 (The aura phase)

연쇄살인범들은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게 되는 심리적 변화를 경험하는데 이는 살인을 저지르게 될 것이라는 신호다. 예를 들어 주위 사물들이 갑자기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는가 하면, 소리나 색깔 등이 전보다 훨씬 선명하고 생생하게 느껴진다.

연쇄살인범들은 이런 심리적 전조기에 현실감각을 잃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드는데 범죄를 상상하면서 희열을 맛보기도 한다. 이러한 환상은 실제로 살인을 저지르기 전까지 수주일 또는 수년 동안 마치 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된다. 강호순 역시 "1차 범행 뒤에는 살인 충동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 2단계 - 탐색기 (The trolling phase)

이러한 환상이 지속되면 연쇄살인범들은 살인에 대한 강박증을 갖게 되고 희생자를 찾아 나서게 된다. 연쇄살인범들은 희생자를 스토킹 하거나 납치 장소를 물색하는 등 사전조사를 마친 후에 실행에 들어간다.

한적한 주차장, 큰 쇼핑센터 주차장의 외진 곳, 어둡고 후미진 골목 등은 특히 위험하다. 강호순도 화성군 비봉면 39번 갓길에서 희생자들을 살해했는데 이 곳은 가로등이 거의 없어 라이트를 최대로 켜고 다녀야 하는 으슥한 지역이다.

또, 연쇄 살인범들은 저지른 연쇄살인사건에 대해 언론의 관심이 쏟아지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범행 수법을 사용, 수사에 혼선을 빚게 할 만큼 주도면밀함을 보이기도 한다.

▼ 3단계 - 구애기 (The wooing phase)

강호순이 피해자들을 강제로 납치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는 것처럼 연쇄살인범들은 훤칠한 외모와 친절한 매너로 희생자들의 신뢰를 얻는다. 연쇄살인범들이 희생자에게 호의를 베풀거나 가까이 지내다 "설마 이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경계심이 무너지면 갑자기 본색을 드러낸다.

미국의 대표적인 연쇄살인범 테드 번디는 곱상한 외모로 무거운 책을 힘들게 나르다 떨어뜨리는 척하며 여학생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를 도와준 여학생들은 결국 둔기에 얻어맞고 기절한 채로 납치 당했다.

▼ 4단계 - 납치 (The capture)

연쇄살인범들은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하므로 납치는 매우 재빠르게 이뤄진다. 갑자기 차 문을 잠가 버리거나 창문으로 급습하거나 피해자를 주먹으로 때려 정신을 잃게 하기도 한다. 아니면 음산한 협박을 통해 공포감에 희생자가 무기력해지게 만든다.

▼ 5단계 - 살인 (The murder)

연쇄살인범들은 희생자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나 비명을 들으며 절정감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여성들을 성폭행하는 것도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주기 위해서라는 분석이다.

연쇄살인범들은 대부분 어릴 적 부모나 친지로부터 학대를 당한 경험이 있는데 살인의 순간, 이런 끔찍한 기억을 떨쳐 버리고 일종의 승리감과 쾌감을 느낀다. 곧 희생자를 절대적으로 복종시키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6단계 - 회상기 (The totem phase)

연쇄살인범들은 살인 자체가 일종의 의식이기 때문에 살인을 기록하거나 기념하는 물건을 남기기도 한다. 대부분 시신을 훼손하여 남기게 되는데 이를 승리의 상징으로 받아들인다.

▼7단계 - 침체기 (The depression phase)

연쇄살인범들의 살인을 계속하는 데에는 절정감이 사라진 침체기 단계에서 우울감과 절망감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심리적 준비기부터 회상기까지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 정상적인 사회 생활로 돌아가고 자신의 범죄에 대한 자책으로 괴로워하기도 한다. 이 때 경찰이나 기자에게 간단한 편지로 고해성사를 대신하기도 하며, 스스로를 학대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살인 충동에 사로잡히고 다시 1단계로 돌아가 환상을 보기 시작한다. 심리적 준비기부터 회상기까지가 반복되면 또 다른 희생자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우경임기자 woohaha@donga.com


▲ 동아닷컴 백완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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