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14>

  • 입력 2009년 1월 21일 14시 22분


과거는 오래된 미래고 미래는 오지 않은 과거다.

치 치치치치 치치!

갑자기 글라슈트가 경련을 일으켰다. 불규칙하게 떨리는 기계음이 점점 커졌다. 볼테르는 연구원들에게 로봇 외장을 열고 기능을 하나하나 체크하도록 지시했다.

사이스트로 오기 전까지 아프리카 대평원을 매일 10킬로미터씩 달렸다며, 세렝게티로 불리기를 원하는 꺽다리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마이크로 칩이 부족합니다. 빨판을 쏠 때 허리 구멍으로 빠져나갔나 봅니다."

"몇 개나?"

"서른 개쯤 입니다."

"당장 찾아."

"……그 일이야 청소로봇에 내장된 귀중품 분리 기능을 사용하면……."

열다섯 살까지 아바나특별시 산 크리스토발 대성당 앞에서 기타 치며 노래했노라 떠벌리는 뚱보 보르헤스가 갈색 볼에 바람을 잔뜩 넣은 채 말끝을 흐렸다.

"글라슈트 정비를 전담하겠다고 간청한 사람이 누구였지? 지금 못 찾으면 부족한 칩 구입비를 두 사람 월급에서 제하겠어. 줄잡아 넉 달 치는 넘을 걸."

"찾아얍죠. 찾겠습니다."

세렝게티와 보르헤스가 무릎을 꿇고 훈련장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캐릭터 확실한 사족(四足) 로봇 한 쌍이 예서 뭘 하시나?"

뇌신경과학자 노민선이 뿔테 안경을 치켜 올렸다. 단정하게 묶은 긴 머리에 흰 가운 차림이다. 학교만 떠나면 짙은 화장에 모델 뺨치는 스타일로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글라슈트 팀은 아직 그녀의 변신을 확인하지 못했다.

민선은 볼테르와 입씨름을 할 만큼 로봇에 박식했다. 특히 생산이 중단된 초창기 로봇을 재현하는 취미가 각별했다. 부품을 깎고 자르고 덧붙이느라 거의 매일 밤을 샜다. 언젠가 볼테르가 왜 하필 초창기 로봇이냐고 물었더니, 민선이 주저하지 않고 되쏘았다.

"최박이 오드리 헵번 좋아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사라가 헵번 닮아 좋다면서요? 둘만 있을 땐 오드리라고 부르겠네 그럼. 내 눈엔 영판 검은 메두산데."

보르헤스가 거대한 엉덩이를 흔들며 울상을 지었다.

"칩 찾습니다, 글라슈트 허리에서 떨어진……."

"하나만 줘 봐요."

세렝게티가 쌀알보다 작은 칩을 건넸다. 민선은 어깨에 멘 여행용 가죽 가방에 칩을 넣고 재빨리 지퍼를 닫았다. 가방이 울퉁불퉁 시끄러웠다. 잠시 후 가방을 열고 뒤집자 엄지만한 바퀴벌레 로봇이 백 마리도 넘게 쏟아졌다.

"아! 이거, 징기스(Genghis), 징기스 맞죠? 1980년대에 나온 육족(六足) 보행 로봇?"

세렝게티가 아는 체를 했다. 민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빙고! 기능을 약간 향상시켰답니다. 징기스 포에버(Genghis Forever). 어울리나요?"

"포섭구조(Subsumption Architecture)를 따르는 것 말고, 뭐가 더 나아졌습니까?"

보르헤스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로봇들을 살폈다.

포섭구조는 곤충로봇 징기스를 만들 때 로드니 A. 브룩스가 사용한 통제시스템이다. 그는 단순한 옛 시스템을 그대로 작동시키면서 조금 더 복잡한 새로운 시스템을 층을 나눠 부가하는 방식을 취했다. 1층에서 로봇은 대상과의 접촉을 피하고, 2층에서 로봇은 쉼 없이 움직이며, 3층에서 로봇은 흥미로운 대상을 발견하고 탐색한다. 항상 위층이 통제의 주도권을 쥐며, 위층의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때만 주도권이 그 아래층으로 넘어간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바퀴벌레 로봇들이 타이거봇의 잘려나간 앞다리를 향해 일제히 머리를 돌렸다. 바퀴벌레 로봇 한 마리가 앞다리를 힘껏 밀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어, 저게 뭐야? 와우!"

보르헤스의 탄성과 함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바퀴벌레 로봇이 서로 엉켜 합치더니 팔뚝만한 바퀴벌레 로봇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대형 바퀴벌레 로봇은 타이거봇의 앞다리를 쉽게 밀어 굴렸다. 그리고 다시 순식간에 해체된 소형 바퀴벌레 로봇들이 바닥을 빠르게 훑어나갔다. 칩을 찾은 바퀴벌레 로봇은 동작을 멈추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런 식으로 징기스 포에버는 10분 만에 칩 서른두 개를 찾아냈다.

볼테르가 그 칩을 꼼꼼히 제자리에 꽂자 글라슈트의 경련이 멈췄다. 세렝게티와 보르헤스는 징기스 포에버의 합체술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지만, 민선은 키스멧(Kismet, 브룩스 팀이 만든 얼굴 표정이 풍부한 로봇)의 눈동자 부품을 사야 한다며 훈련장을 떠났다.

저물 무렵 차세대로봇연구센터(RINGE)를 삼키는 붉은 기운이 탐욕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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