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방형남]삐라의 힘, 진실의 힘

  • 입력 2008년 10월 21일 20시 55분


남북 관계의 큰 변수로 떠오른 대북(對北) 전단(삐라)은 ‘사랑하는 북녘의 동포들에게’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비닐에 인쇄돼 물에 젖어도 훼손되지 않고 쉽게 찢어지지도 않는다. 가로 25cm, 세로 20cm 크기의 비닐 양면 가득 북녘 동포에게 보내는 사연이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 있다. 6·25전쟁은 북에서 주장하는 북침이 아니라 남침이 맞다는 설명에 이어 남한과 북한의 경제력 격차를 보여주는 수치가 등장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부인들, 그리고 자녀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가계도(家系圖)와 함께 김 위원장은 ‘순결하고 자애로운 인민의 지도자’가 아니라고 폭로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북녘 동포도 알 권리 있다

북한 정권이 가만있을 리 없다. 어제도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이 나서서 ‘남한 정부가 민간단체의 전단 살포를 묵인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2일 남북군사실무회담과 16일 노동신문 논평원을 통한 대남(對南)경고도 전단과 관련이 있다. 북한의 반발은 김 위원장을 향한 ‘충성 경쟁’이기도 하다.

전단에는 북한 주민들의 눈과 귀를 열기에 충분한 ‘진실들’이 담겨 있다. 김 위원장의 건강 이상설을 계기로 남한에서는 어느 아들이 후계자가 될 것인지를 예상하는 시나리오가 무성하지만 정작 북한에서는 거의 모든 주민이 최고지도자의 자식이 몇 명인지도 모른다. 북한군 상좌(중령과 대령 사이 계급) 출신으로 외화벌이 사업까지 했던 한 탈북자는 “군 고위간부인 나도 김정일의 자녀와 부인의 이름은 물론 숫자조차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탈북자들은 무엇보다 김 위원장의 여자 문제를 상세히 거론한 것이 북한 정권을 자극한 결정적 요인이라고 분석한다. 전단에는 모두 9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전단은 자유북한운동연합(대표 박상학)을 비롯한 3개 탈북자단체가 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9년 북한을 탈출해 2000년 남한에 온 박 대표는 4년 전부터 전단을 보내기 시작했다. 매년 150만∼200만 장의 전단을 보낸다.

전단은 수소가스를 채운 길이 12∼15m, 폭 2m의 자루 형태 비닐풍선을 이용해 북한으로 날린다. 자동차에 가스통을 싣고 여기저기 이동하다 바람의 방향과 속도가 적당한 지역에서 풍선을 날린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기도 한다. 백령도에서 날리면 남포는 물론 평양까지 전단을 보낼 수 있다. 전단이 엉뚱하게 청와대에 떨어져 곤란을 겪기도 했지만 수십 차례 연습을 한 터라 정확성이 크게 높아졌다. 박 대표는 “사리원시를 겨냥해 10개의 풍선을 날리면 7, 8개는 목표지점 상공에서 전단을 쏟아낸다”고 설명했다.

많지는 않지만 박 대표의 ‘외로운 투쟁’을 돕는 손길들도 더러 있다. 성금을 보내주는 이들도 있고 기술 지원을 해주는 전문가도 있다. 풍선이 목표지역 상공에서 전단을 쏟아내려면 60만∼70만 원짜리 시계장치가 필요하지만 자유북한운동연합은 구입할 형편이 못 된다. 그 대신 한 대학교수의 도움으로 화학반응을 이용해 원하는 시간에 풍선에서 전단을 떨어뜨리는 장치를 개발했다. 전단 작성을 도와주는 전문가도 있다.

박 대표는 4월부터 전단을 봉투 형태로 만들어 100∼150장에 하나꼴로 1달러 또는 5위안, 10위안짜리 중국 지폐를 넣어 보낸다. 1달러는 남한에서는 푼돈이지만 북한에서는 큰돈이다. 옥수수 4kg을 구입해 3인 가정이 3, 4일은 먹을 수 있다.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에게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큰 선물이다.

‘진실 알리기’ 방해는 말아야

전단 살포는 암흑세계에 갇힌 북한 주민을 깨우치는 의미 있는 사업이다. 북한 정권의 반발과 북녘 동포에게 진실을 알려야 하는 의무 가운데 어느 것을 중시할 것인가. 우리 정부의 수준을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이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9월 23일 박 대표를 만나 격려했다. 우리 정부는 그런 용기를 보여주지 못했다. 앞장서서 북한 주민에게 진실을 알리지 못한다면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을 방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정부가 북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탈북자 단체에 ‘자제 당부’ 이상의 간섭은 하지 않는 뚝심이라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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