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정위용]시베리아 개발장벽 허물려면

  • 입력 2008년 10월 16일 02시 59분


1880년대 러시아를 배경으로 한 미국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는 아직도 모스크바에서 인기가 있다.

러시아 귀족사관학교에 다니던 주인공 안드레이 톨스토이와 벌목기계 판매를 위해 로비에 나선 미국 여성 제인 칼라한의 비극적 사랑을 입에 올리는 러시아인들은 여전히 많다.

이 영화의 러시아 제목은 ‘시베리아 이발사’. 칼라한이 러시아에서 팔려고 하는 벌목기계 이름이다. 러시아 영화 평론가들은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하던 톨스토이가 자신을 찾아온 칼라한을 외면하는 장면을 가장 인상적이고 리얼한 장면으로 꼽고 있다.

“당시 톨스토이가 살았던 시베리아는 벌목기계를 갖고 덤볐던 서양과 러시아가 충돌하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 영화를 ‘오늘의 러시아’로 보는 관객들이 의외로 많다. 많은 러시아인들은 영화 속 ‘칼라한’에게서 러시아 자원을 탐내는 외국인들을 본다.”

한 러시아 평론가의 이야기다.

러브스토리가 주된 내용인 영화에 대한 ‘독특한 해석’이라는 반론도 있을 수 있지만, 아무튼 자원보유국 국민은 이렇게 영화를 해석한다.

시베리아 유전지대에서 세계 굴지의 기업들을 손떼게 만든 러시아 정부의 자원 수호 의지가 일반인들에게까지 확산돼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보호막이 쳐 있는 시베리아에 한국이 도전장을 던졌다. 이명박 대통령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그 계기가 됐다.

한국은 이번에도 장벽을 만났다. 한국 측은 ‘시베리아 공동개발 행동계획’을 한-러 공동성명 문안에 넣을 것을 희망했지만 러시아 측의 반대에 부닥친 것으로 알려졌다.

13일 모스크바를 방문한 박진 이미경 의원 등도 러시아 의회에 들러 한국 기업의 시베리아 진출 의향을 전달했으나 “한국이 적극 나선다는 것이 놀랍다”는 얘기만 들었을 뿐이다.

이 지역을 노리던 외국 기업들은 “자원 민족주의 바람 때문에 시베리아 진출 문제를 해결하는 방정식의 차수가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변수도 크게 늘어났다”고 털어놓고 있다.

한국 기업들도 최근 고차방정식 앞에 두 손을 들었다. A기업은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당시 체결했던 양해각서를 토대로 5억 달러 규모의 정유공장 공사에 입찰했다. 그러나 러시아 측은 공사 수주권을 내주는 대신 A기업이 제출한 공사 설계도를 보고 자체 공사를 벌이는 ‘단물 빼내기’ 전술을 썼다.

한국 정치인들의 정략적 접근과 한탕주의는 스스로 변수를 늘리는 결과를 낳았다. 더구나 한국에서 터진 유전게이트 등으로 러시아 측은 한국 기업의 신뢰를 재고하고 있다.

지금까지 시베리아에서 성과를 거둔 해외 기업은 중국 업체였다. 이들은 러시아 무기를 사들인 중국 정부의 후원과 양국 밀월 관계를 이용해 송유관 공사를 수주하거나 첨단기술까지 챙겼다. 그런데 중국 기업조차도 요즘엔 수시로 바뀌는 산업정책과 견제 논리 때문에 골탕을 먹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은 이제야 중국 모델을 연구한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철지난 1차방정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장기 전략 차원에서 민관 합동으로 해법을 찾아야 할 분야에서 개별 기업의 단순 이윤 논리를 앞세우는 것이 그런 경우다.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를 칼라한의 경제논리로 보면 영화에서처럼 실패한 로비만 이어질 뿐이다.

한국은 칼라한이 걸었던 길을 피해가야 한다. 그러자면 러시아가 세워놓은 고차방정식의 차수를 낮추는 전략과 한국 스스로 만든 변수를 줄이는 방안을 먼저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위용 모스크바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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