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병호]방심을 먹고 자란 여간첩

  • 입력 2008년 8월 30일 02시 53분


탈북자로 위장해 2001년부터 국내에 잠입해 암약하던 여간첩 원정화가 체포됐다. 모든 간첩 검거가 다 값지지만 지난 10년간 열악했던 대공 수사 환경을 감안하면 더욱 특별한 일이다. 원정화는 50여 차례의 안보 강연을 하며 군부대를 휘젓고 다닐 정도로 우리 사회에 성공적으로 뿌리 내린 간첩이었다. 암살 지령까지 받은 위험한 테러리스트였다.

지난 세월, 간첩을 잡는 일은 시대 조류를 거스르는 역주행과 같았다. 북한을 달래서 평화를 이뤄 내고 통일을 앞당긴다는 거창한 명분 앞에 대공 수사는 한낱 걸림돌에 불과했고 시대정신을 망각한 근시안적 행위였다. 백안시 속에 역경을 뚫고 3년 2개월간이나 내사를 진행해 개가를 올린 수사관들의 끈질긴 프로 근성에 찬사를 보낸다.

햇볕정책은 북한이 더는 안보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환상을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퍼뜨렸다. 여간첩 사건은 이런 환상에 일대 경종을 울린다.

수사 발표에 따르면 원정화 가족은 대를 이은 간첩 가족이었다. 특이한 가족 이력은 북한이 얼마나 대남 간첩 사업을 중시하고 이에 매달리는지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간첩을 양성, 파견하고 운영하는 일은 결코 간단한 사업이 아니다. 15세부터 훈련 받은 원정화 사례에서 보듯 기간도 오래 걸리고 돈도 많이 든다. 북한으로서도 철저한 목적의식과 계산 없이는 엄두를 못 내는 위험한 일이다.

왜 북한은 이토록 어려운 사업에 끊임없이 매달리는가? 답은 명백하다. 남한의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를 통한 적화의 꿈 때문이다. 원정화 사건은 김정일이 아직도 이 끈을 붙잡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다. 달리 해석할 방법이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사건은 재차 꼬이는 북핵 문제의 심각성을 재조명하고 위험성을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북핵 문제와 여간첩 사건이 별개처럼 보이지만 실은 대남 적화라는 뿌리에서 파생돼 연계된 사안이기 때문이다. 불과 약 2개월 전 북한은 금강산에서 순진무구한 우리 가정주부를 총으로 쏘아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이후에도 북한은 오히려 우리 측에 사과를 요구하는 등 반인륜적 폭력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일련의 행태를 서로 연계, 조합해 보면 북한은 남한을 적화하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 어떤 폭력도 마다하지 않는 김정일 체제가 ‘지고의 무기’라는 핵무기를 손에 쥔 악몽 같은 시나리오가 전개된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남북한 간 국력 차로 봐서 이런 상황 인식은 냉전적 사고이며 기우일 뿐이라는 논리로 다시 경시할 수는 없다. 미국의 정치인 로버트 케네디는 ‘자유를 지킴에 있어 과도한 것은 오히려 덕(Virtue)’이라고 말했다. 국가 안보에 있어 안이한 자세는 재앙으로 이어짐을 경계하는 말이다.

이번 사건을 국가 안보를 우리 사회 제1의 가치로 복원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간첩을 검거할 때마다 제기되는 용공 조작설이 더는 나오지 않도록 사회 분위기도 일신돼야 한다. 국가정보원을 비롯해 경찰, 국군기무사령부 등 관계 기관의 대공 수사 능력을 보강해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단단한 방첩 체제를 시급히 구축해야 한다.

북한의 대남 공작 기도가 사사건건 좌절되도록 해 북한으로 하여금 대남 적화의 꿈이 허황된 망상임을 하루빨리 깨닫게 해야 한다. 북한이 공존 공생의 장으로 하루속히 나오게 하는 첩경이 되기 때문이다.

이병호 울산대 정치외교학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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