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PY’를 아십니까. 혼란 부른 법정계량단위

  • 입력 2008년 8월 26일 16시 31분


26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이촌동의 한 부동산 중개업소.

집을 보러 온 김 모(45) 씨가 "유리창에 붙어 있는 매물 중 30평대가 어느 것이냐"고 묻자 중개사 홍 모(55)씨가 "109㎡라고 써 있는 게 33평짜리다"라고 대답했다.

"'평'이라는 말을 쓰면 위법이 아니냐"고 묻자 홍씨는 "제곱미터(㎡)단위로 얘기하면 손님들이 이해하지 못해 어쩔 수 없다"고 답했다.

홍씨는 "단속이나 계도를 피하기 위해 부동산 유리창에 써붙인 매물 목록에만 미터법을 쓸 뿐, 실제 거래를 할 때는 모두 평 단위를 쓰게 된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촌동 일대 대부분 부동산 중개업소는 면적 표시에 평을 함께 쓰고 있었다. 다른 지역 중개 업소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형', 'PY'를 아십니까

지난해 7월 정부가 도입한 법정계량단위가 현장에서는 아직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이를 도입한 취지는 계량 단위를 척관법이나 인치법 대신 미터법으로 통일해 소비자의 피해를 막고 낭비를 줄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부동산 중개업소, 금은방, 정육점, 가전매장 등 현장의 판매자나 소비자들은 여전히 익숙한 척관법이나 인치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

척관법 등을 사용하다 적발될 경우 최고 50만 원의 과태료를 물어야 하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단속을 피해가기 위해 '형' 'PY'(평의 영어 약자) 등 변칙적인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서울역 롯데마트의 정육코너.

안내판에는 g 단위로 고기 가격이 표시돼 있었지만 실제 거래를 할 때 "그램"(g)이라는 말은 들을 수 없었다.

쇼핑객들은 "등심 3근" "삼겹살 5근" 등으로 주문을 했고 점원들 역시 그런 주문에 맞춰 고기를 잘라 포장해 건넸다.

투명한 냉장고에 진열된 고기 앞에는 "2인 가족" "3인 가족" 등으로 '근'을 대신하는 새로운 용량 표기법도 눈에 띄었다.

판매 점원은 "g단위로 주문하는 손님은 드물다"고 말했다.

에어컨, TV 등을 판매하는 가전업체나 유통업체들도 평과 인치를 모두 사용하고 있다.

각종 전단지와 매장 안내판에 40인치 TV는 '40형', 20평용 에어컨은 '66.12㎡(20형)' 등의 방법으로 사실상 평형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 특히 TV의 경우 아예 미터법 표기를 생략하고 '형'만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한 가전업체 관계자는 "소비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단위로 물건을 팔수는 없다"며 "법을 어기지 않는 한도 내에서 당분간은 병기를 계속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60∼90% 법정 단위 쓰고 있다" 지만 현장에선 불편해해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는 "법정계량 단위가 거부감 없이 정착돼 가고 있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뒤 "아직도 일부 신문, 방송보도나 분양광고에 평당 가격표기 및 병기 사례가 나타나고 있어 계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기술표준원은 "6월 말 현재 단속대상인 공공기관의 97%, 대형건설사 81%, 귀금속상의 87%가, 계도대상인 중소건설사도 73%, 부동산 중개업소는 69%, 지역정보지도 66% 법정계량단위를 사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술표준원은 그러나 "올해 7월에만 신문, 방송에서 모두 549차례 부동산의 평형 가격을 표시하는 등 병기사례가 있어 계도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계약서나 홍보물, 매체 등에 표기된 미터법만을 조사한 것 일뿐, 국민들의 인식을 전환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지적.

정부는 "계량단위 사용의 혼선으로 화성 탐사선이 추락했다"는 등의 내용으로 TV와 라디오 등에 캠페인성 광고를 내보내는 데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었다. 척관법 등을 사용할 경우 과태료를 물게 된다는 사실도 신문 등을 통해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그러나 캠페인과 단속과 계도에만 힘썼을 뿐, 바뀐 계량단위에 따라 벌어지는 혼란을 수습하는 데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부동산 중개업소 등에서는 똑 같은 42평 아파트도 138.85m², 139m², 138.9m² 등으로 표기되고 있다.

정부는 "42평은 140m², 24평은 80m² 등으로 표기한다"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놓고도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아 '형' 'PY' 등 세계에 유래 없는 변형 계량단위를 양산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지금 이대로 가면 제도 자체가 흐지부지 될 가능성도 있다"는 시각이 고개를 들고 있다.

귀금속판매업중앙회 김대호 차장은 "1960년대에도 미터법 사용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하다가 흐지부지 됐다"며 "정부 시책보다 일반 소비자의 인식을 바꾸는 게 먼저다"라고 말했다.

나성엽기자 cpu@donga.com

우경임기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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