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낙인의 법과 사회]열정의 축제가 끝난 후

  • 입력 2008년 8월 26일 03시 01분


짜이젠(再見). 베이징에서 세계의 젊은이가 펼쳐 보인 올림픽 축제는 끝없는 신화와 전설을 남기고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외다리로 10km의 물길을 가른 남아프리카공화국 나탈리 뒤 투아의 투혼, 미국의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의 8관왕 등극,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가 이룩한 육상 100m 신기록.

특히 대한건아가 보여준 아름다운 승전보는 온 국민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 세계를 들어 올린 여자 헤라클레스 장미란, 기초체육의 새로운 장을 연 마린 보이 박태환, ‘우생순’ 드라마를 재현한 아줌마편대의 여자 핸드볼, 마지막 순간까지 온 국민의 가슴을 졸이게 한 야구. 이보다 더 감동적인 연출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춥고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한 ‘헝그리 스포츠’ 시대를 마감하고 세계 7위의 위대한 금자탑을 이뤄냈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에 외국에서 진행되는 스포츠 중계방송은 온 국민의 눈과 귀를 라디오에 고정시켰다. 아나운서의 흥분된 목소리는 마치 현장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결과가 어찌되든 간에 중계방송을 듣는 순간만은 언제나 승리는 우리의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스포츠는 흐트러진 민심을 일깨우는 국민적 통합의 상징으로 작동한다. 나라 잃은 서러움을 안고 달린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는 동아일보 지면에서 지워져 버렸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라는 경제 국난에 박세리가 보여준 맨발 투혼은 프로골프가 뭔지 모르는 국민에게도 희망의 메시지였다.

단일민족 단일국가의 국민적 열정은 응원을 통해서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2002년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대∼한민국’이라는 함성과 더불어 전 세계 곳곳에서 펼쳐진 거리응원은 한국적 스포츠문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거리의 환호성은 불의의 사고로 꽃다운 생을 마감한 소녀들을 추모하는 촛불집회로 대체되고, 2008년 봄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집회로 귀결된다.

열정적 함성 뒤에는 명암이 교차하기 마련이다. 촛불집회와 거리응원은 집단적 의사를 표현하는 집회 및 시위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거리응원은 어느새 국민 축제로 자리 잡는다. 서울 세종로 길이 막히고 교통이 통제돼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온 국민은 거리의 함성에 매몰된다.

여기에 찬반논쟁이 있을 수 없다. 오로지 한마음으로 승리를 기원할 따름이다. 하지만 촛불집회의 성격을 아무리 촛불문화제로 규정짓는다 하더라도 찬성과 반대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수많은 사람이 모이는 집회에는 군중심리가 작동하기 마련이다. 선량한 시민의식은 실종되고 군중심리에 휩싸여 헤픈 불장난이 난무한다.

촛불을 밝히는 쪽이나 촛불을 원망하는 쪽이나 사적인 동기가 아니라 공공선(公共善)을 향한 의지의 발로라는 점에서 감성보다는 이성적 대응이 요구된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서로가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공동체 정신을 복원해야 한다. 나만이 정의(正義)라는 일방통행식 외골수는 결국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민통합을 저해할 뿐이다.

나랏일에 대한 자신의 의사표현은 주권자로서 당연한 노릇이다. 그런데 응원이든 촛불이든 그 순간에 표출된 열정은 감성적일 수밖에 없다. 승리를 향한 격렬한 몸싸움의 와중에서 이성이 감성을 제어하기는 어렵다. 촛불을 밝혀 든 군중에게 이성만을 요구할 수도 없다.

올림픽 열전도 끝이 나고 촛불도 날을 밝힌 지 오래다. 올림픽에서의 승리를 기원하고 국민건강을 지키기 위해 촛불을 밝힌 열정은 국민적 에너지를 발산하는 감성이 지배하는 장이었다. 이제 지난날을 성찰하고 내일을 향한 국민적 이성과 국가이성을 보듬을 때다.

성낙인 서울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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