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성희]광우병 파문의 사회심리학

  • 입력 2008년 6월 3일 19시 53분


현대인은 불안하다. 프랑스 저술가 알랭 드 보통은 저서 ‘불안’에서 지위로 인한 불안에 대해 대단한 통찰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현대인의 불안감은 단순히 낮은 지위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올해 한국을 방문한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는 현대인은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는 위험, 실재하지 않는 위험 때문에 불안을 느낀다고 말한다. 불확실하고 유동적인 상황이 불안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현대사회의 특성을 ‘위험사회’라는 말로 정의했다. 여기서 위험은 직접 감지되지 않는 위험, 그래서 예측하기 어려운 위험이다.

불확실성이 키우는 불안

위험을 예측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과학이다. 과학은 현대인의 생활을 놀라울 정도로 발전시키고 편리하게 만들었다. 기상정보가 대표적이다. 첨단 측정장비와 슈퍼컴퓨터 덕에 우리는 날씨를 예측하고, 날씨에 맞춰 살아간다. 19세기만 해도 날씨는 전쟁의 승패를 가르고, 사람의 생사를 결정하는 위험요인이었다. 날씨에 대한 불확실성이 많이 사라진 지금은 날씨 때문에 불안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과학의 시대, 합리의 시대일수록 불확실성은 사람들을 못 견디게 불안하게 만든다.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 사람들이 불안해하는 이유도 그럴 것이다. 광우병의 실체와 감염경로가 두부모 자르듯 정확하고 설명이 가능했다면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쇠고기를 태연하게 먹는 미국인이 이상한 걸까? 그건 아니다. 문제는 광우병 쇠고기에 대한 민감도가 미국인과 한국인이 다른 것이다. 그걸 모르고 미국산 쇠고기는 미국인도 똑같이 먹지 않느냐고 주장해 봐야 국민을 무시하는 걸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과도한 위험인식이 나라를 뒤흔든 사건이 이번만은 아니다. 2003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 유치선언으로 촉발된 전북 부안사태가 그렇다.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격렬히 싸우는 바람에 무려 43명의 주민이 구속됐고, 부안은 지금도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방사성폐기물의 안전한 처리에 대한 과학적 타당성과 핵안전 리스크가 격렬하게 대립했지만 주민들은 핵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지 못했다.

위험사회론이 한국처럼 잘 맞아떨어지는 곳도 드물 것이다. 위험에 대한 한국인의 불안과 공포는 유난스럽다고 할 수 있다.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가 무너지는 등 많은 대형사고를 겪었기 때문이란 주장도 있지만 그렇다면 원자폭탄을 맞았고 상존하는 지진의 위험을 안고 사는 일본사회는 왜 저렇게 안정돼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자동차사고로 죽을 확률이 비행기사고로 죽을 확률보다 1000배는 높은데도 비행기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유괴범이 아이들의 생명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친부모에게 살해되는 아이가 수천 배 더 많다. 마찬가지로 ‘광우병 쇠고기가 들어올 확률이 거의 없다’는 것이 객관적 사실이라 해도 개개인은 자신이 광우병에 걸릴 확률 절반, 안 걸릴 확률 절반으로 인식한다. 로또에 당첨될 확률이 100만분의 1이라고 해도 개인으로서는 당첨되거나 안 되거나 둘 중 하나인 것과 같은 이치다.

믿음이 사실을 이긴다

요즘 정부나 청와대 사람들은 정말 혼란스러울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엄마한테 매를 맞는 어린이 심정일지도 모르겠다. 류우익 대통령실장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동의하기 어렵지만…”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광우병 파문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어떤 현상에 대한 객관적 사실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인식(perception) 사이에는 크나큰 괴리가 있음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정치가 대상으로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인식(믿음)’이다.

이명박 정부의 잘못은 이렇게 복잡한 사람들의 심리구조를 이해하지 못하고 객관적 사실에만 부합하면 국민이 설득되리라고 속단한 데 있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정치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장사다. 정부는 지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하지만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유사 이래, 사실과 믿음과의 싸움에서 어느 쪽이 이겼는지를 보면 해답이 나와 있다. 믿음이 이긴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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