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봄 소풍, 동구릉에서

  • 입력 2008년 5월 1일 02시 57분


얼마 전 아버님 묘소에 다녀오는 길에 동구릉에 들렀다.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와 영조대왕 등 9릉 17위의 왕과 왕후가 안장돼 있는 곳이다. 초등학교 땐가 중학교 땐가 분명히 이곳으로 소풍을 온 기억이 난다. 1960, 70년대에는 마땅히 소풍갈 만한 곳이 없어 서삼릉 서오릉 홍릉 등 근교 왕릉과 국립묘지 또는 관악산 등으로 관광버스를 전세 내어 소풍을 다녀오곤 했다.

왕릉과 소풍의 추억

능역(陵域) 일대를 거닐면서 내 마음은 어린 시절 즐거웠던 소풍날로 돌아갔다. 찬합에 담긴 ‘황홀한’ 김밥과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전기구이 통닭’, 구운 오징어와 친구 녀석이 몰래 숨겨온 캔 맥주. 생각만 해도 입에 침이 가득 고이는 음식들이다. 왕릉에서 ‘불경스럽게’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던 놀이를 비롯해 수건돌리기, 닭쌈과 기마전, 반별 장기자랑, 행운권 추첨 등.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소풍의 하이라이트는 보물찾기다. 나무 위, 돌 밑, 바위 사이에 숨어 있는 ‘보물’을 찾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고, ‘보물 캐기’에 성공한 아이들은 입이 찢어질 듯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 무서운 학생주임 선생님도 이날만은 아이들의 일탈(逸脫)을 기꺼이 눈감아 주시곤 했다.

그러나 소풍이 모두에게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도시락을 싸오지 못해 아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 달랑 젓가락 한 세트만을 들고 나타나 친구들을 괴롭히던 아이, 담임선생님 드릴 도시락과 통닭을 준비해온 반장 엄마와 이를 질시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이 등등. 문득 40여 년 전 나를 지켜본 묘목 한 그루가 이제는 거목(巨木)이 돼 어디선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한 그루 한 그루에 신경이 쓰였다.

제일 먼저 태조의 묘소인 건원릉(健元陵)을 찾았다. 좋게 말해 무혈역성혁명(無血易姓革命)이지 사실상의 쿠데타로 집권한 그의 말년은 결코 평안하지 않았다. 재위(在位) 고작 7년에 ‘왕자의 난’ 등 못 볼 일을 많이 겪었고, 상왕(上王) 10년 끝에 74세에 생을 마감했다. 모든 능원(陵園)에는 잔디를 입히지만 유독 그의 봉분에만 억새풀이 심어져 있는 사연이 재미있다. ‘태조가 고향인 함경도 영흥에 묻히기를 원했으나 아들 태종이 아버지를 그곳까지 모시지 못해 대신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봉분에 덮어주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억새풀의 특성상 자주 깎으면 죽게 되므로 1년에 한 번 한식날에만 깎아준다’고 한다.

이어 MBC 인기 드라마 ‘이산’에 등장했던 21대 영조와 그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 있는 원릉(元陵)을 찾았다. 영조는 조선왕조의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52년이지만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남겼다. 하지만 탕평책을 써 당쟁의 근절에 힘썼고, 균역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준 성군(聖君)이다. 드라마에서 그토록 정조를 괴롭히는 정순왕후는 정조보다 더 오래 삶을 지속하다 순조 5년인 1805년 61세를 일기로 작고해 영조임금 왼편에 모셔졌다.

어디로 가서 무엇을 배우는가

제14대 선조 임금의 능인 목릉(穆陵)에서는 임진왜란으로 그가 겪은 고통과 오욕,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그려진 신하 이순신에 대한 질시와 애증이 생각나 만감이 교차했다. 어린 시절 이순신은 만고(萬古)의 충신이요 명장이었으나 최근에는 그에게도 ‘인간적 면모’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선조 또한 나름대로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임금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토록 드라마틱한 역사를 왜 초중학교 재학시절에는 귀담아듣지 않았을까. 선생님들조차 그런 얘기를 해주시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 동구릉은 그저 민둥산이 대부분인 서울 근교에 그나마 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공원 같은 곳이었을 뿐이다. 요즘 아이들은 어디로 봄 소풍을 갈까. 또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배우며 느끼고 돌아올까. 햇살 따듯한 봄날 동구릉에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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