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호 칼럼]영랑의 절창을 유행가처럼

  • 입력 2008년 4월 28일 02시 59분


오래전에 비교문학회의 참석차 네덜란드의 레이던에 들른 일이 있다. 레이던대 근처의 고층건물 벽에 커다란 페인트 글씨로 17세기 일본의 승려시인 바쇼(芭蕉)의 하이쿠가 세로로 쓰여 있는 것이 보였다. 놀랍고 부러웠다. ‘거친 바다여 사도가(佐渡) 섬에 누워 있는 미리내.’ 사도가 섬은 옛 중죄인의 귀양 터였고 원문으로 읽으면 이미지가 가슴 시리게 인상적이다.

日생활 스며든 하이쿠, 유럽 열광

17음절로 된 일본의 하이쿠는 19세기 말부터 구미 쪽에 알려졌다. 1910년대의 영미 이미지즘 시운동에 영향을 끼쳤고 프랑스에서는 1905년에 벌써 그 모조품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인들이 나섰다기보다 일본 거주 외국인들이 홍보한 결과다. 하이쿠가 생활 곳곳에 침투해있어 곧 외국인들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처음엔 그 이국정취에 끌렸으나 곧 신선한 이미지에 매료된 것이다. 일본이 쇄국정책을 쓸 때에도 국지적으로 개방한 곳이 있었고 그래서 네덜란드와 일본의 교류는 역사가 길다. 레이던 고층건물의 하이쿠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인들의 하이쿠 열기는 대단하다. 200만 명을 헤아리는 동호인들이 시작을 꾀하고 있고 근대 하이쿠 시인의 이름을 딴 국제하이쿠상도 시상하고 있다. 대개 외국인이 수상자가 된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이브 본푸아가 “시적 경험 그 자체, 시 이외의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독특한 경험을 향해서 마음과 몸을 여는 능력을 증대시키는 것”이라 정의한 것은 탁견인데 시상식 때 기념강연에서 한 말이다. 바쇼의 영역본 꼭지 글에는 바쇼가 이백 두보와 더불어 동양 최대 시인으로 홍보되어 있다. 우리의 시조와는 달리 교훈적 논평에서 자유롭고 이미지를 배타적으로 중시하는 것이 하이쿠의 특징이다. 응축과 생략 미학의 소산이다.

최근 우리 쪽에서도 곳곳에서 문학제가 열려 시인을 기리고 있다. 지난 주말에 열린 영랑(永郞) 문학제는 시인의 고향 전남 강진에서 사흘간 계속되었다. 영랑시 낭독회가 있었고 관련 강연도 있었고 영랑 생가 국가지정문화재 승격 기념식도 있었다. 시인의 작품을 다시 읽고 시인의 면모를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소홀하게 대접받고 있는 시인을 재평가하는 기회가 되기도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여러 분야에서 쏠림현상이 심하다. 대학 지망 학과뿐만이 아니다. 완두콩이 몸에 좋다는 보도가 나가면 슈퍼마켓에서 곧 동이 나버린다. 월드컵 4강 진출 이후 운동장은 유니폼을 입은 꼬마 축구선수들로 만원이다. 훈련을 지켜보기 위해 출동해서 함성을 지르는 어머니들의 열기도 대단하다.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사회 구성원이 전반적으로 안정감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쉽게 주위 사람들의 영향에 휩쓸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짓궂게 말하면 부화뇌동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문화현상에서도 쏠림현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령 20세기 한국 시인 중에서 중요한 시인을 꼽으라면 많은 시인을 거명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개가 으뜸이라는 소리가 나오면 이내 너도나도 따라하는 쏠림현상이 나타나 그만이 유일자처럼 되어버린다. 자기 판단에 따라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자신감 결여 현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쏠림현상은 곧잘 특정 시인의 과대평가나 과소평가로 이어진다.

위대한 영랑詩세계로 퍼지려면

김영랑은 이러한 쏠림현상의 피해자다. 투박한 정치시편과 부박한 모더니즘이 풍미하던 시대에 자기만의 길을 갔기 때문이다. 시는 본시 말의 음악이고 말은 소리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소리와 뜻의 통일이 서정시의 본원적 경지다. 20세기 한국 시에서 그 모범사례의 하나가 김영랑 시편일 것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널리 알려진 절창이지만 그의 시 세계는 그런 맥락에서 응분의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최근 우리 문학을 해외에 알리려는 번역사업이 왕성하다. 막대한 예산을 쓰고 있는데 효과는 의심스럽다. 그보다 먼저 우리 스스로가 우리 문학의 애독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내국인들이 애용하지 않는 국산품을 어찌 외국인들이 애용할 것인가. 수출보다 내수가 더 중요하다. 책 읽기로 쏠림현상이 일어나도록 방법을 강구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하이쿠의 경우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연세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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