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영]아기돼지 소동과 표현의 상처

  • 입력 2008년 2월 5일 03시 00분


최근 영국에서는 전래 동화 ‘아기돼지 삼형제’를 놓고 새삼 뜨거운 논쟁이 일었다.

우수한 어린이 동화나 교구를 선정하는 정부 산하 교육기술원이 지난달 말 이 동화의 CD롬 버전에 대해 난데없이 “어린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내용이 못 된다”고 부적합 판정을 내린 것이다.

기술원은 문제의 CD롬이 돼지를 불결한 동물로 여기는 이슬람교인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늑대가 ‘훅’ 불면 날아갈 정도로 아기돼지가 허술한 집을 짓는 대목은 건축업자에 대해 나쁜 고정관념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고 덧붙였다.

영국 무슬림위원회까지 나서 “우리는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다”며 기술원을 비난했지만 기술원은 종전의 결정을 고수했다.

영국의 ‘아기돼지’ 소동은 다문화 다인종 사회들이 사회적 약자나 특정 인종과 종교 집단에 상처가 될 만한 표현을 삼가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을 어디까지 수용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이 깊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선의에서 시작된 배려이지만 PC가 강조될수록 이에 대한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PC라는 잣대가 일종의 검열처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PC를 ‘뉴스피크(Newspeak)’와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다. 뉴스피크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조어(造語)로 애매한 표현을 통해 여론을 조작하는 것을 뜻한다.

미국의 교육사학자인 다이앤 래비치(교육학) 뉴욕대 교수는 2003년 출간한 저서 ‘언어경찰’에서 교과서 제작과 시험 문제 출제에 적용되는 PC 관련 지침들이 미국 교육을 망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이 지침에 따르면 엄마가 아이들에게 저녁을 지어주는 삽화는 교과서에 실을 수 없다.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 문화권에서 죽음과 연관돼 있는 올빼미도 등장하면 안 된다. 생일잔치를 못 하는 아이들을 배려해 생일에 대한 언급도 못 하도록 했다.

특히 문학과 역사 교과서에서 PC의 폐해가 크다. 논란이 되는 명작은 배제되고 소수 민족 출신 작가들의 범작은 우대된다.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흑인을 비하하는 ‘nigger’라는 표현 때문에 한동안 금서 목록에 올랐다. 1982년 버지니아 페어팩스 카운티의 ‘마크 트웨인 중학교’ 교장마저 이 명작이 “인종차별적 쓰레기”라며 사용 금지를 검토했다는 일화는 유명한 아이러니다.

서구 중심의 역사 기술을 배제하다 보니 역사 왜곡 논쟁도 끊이질 않는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근거한 1979년 이란 혁명이 여권 신장에 기여했다고 기술한 교과서도 있다. 여성 의류 제조업체나 여학교에는 여성들만 취업할 수 있도록 규정해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도왔기 때문이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도둑(robber)이라는 표현 대신 대안적 쇼핑객(alternative shopper)이라고 하자”거나 “블랙커피나 칠판(blackboard)이라는 단어 사용도 금지하자”는 비아냥거림까지 나온다.

영국의 아기돼지 소동을 보면서 다인종 다문화 시대로 접어든 우리 사회를 되돌아본다. 법무부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국내 체류 외국인 수가 100만 명을 돌파했다. 앞서 다인종 사회를 경험한 나라들은 ‘지나침’을 걱정하지만 우리는 ‘모자람’으로 상처를 주는 일은 없는지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이진영 국제부 차장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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