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정몽준]대선판도 흔드는 ‘의혹’ 보도 신중해야

  • 입력 2007년 11월 10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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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지난 대선에서의 여러 의혹 사건과 언론의 역할 및 책무를 생각해 본다. 2002년 대선 판도를 흔들었던 병풍(兵風) 사건에 대해 사법부는 김대업 씨의 주장이 근거 없다고 최종적으로 결론지었다. 김 씨는 처벌을 받았지만 선거 기간 김 씨의 허위 주장이 대선에 미친 막중한 영향과 언론의 보도 행태에 대해서는 책임도, 진지한 반성도 뒤따른 것 같지 않다.

필자도 당시 근거 없는 주장과 의혹으로 곤욕을 치른 바 있다. 여야 의원들이 국정감사를 통해 필자가 이끌었던 월드컵조직위원회의 회계문제를 거론하며 마치 비리 사실이 있는 듯이 공격하고 선거운동을 위해 ‘붉은악마’ 회장을 협박했다는 주장이 비중 있게 언론에 보도됐다.

‘주장된 사실’과 ‘확인된 사실’의 구분이 불분명한 채 톱기사로 보도됐고 일부 신문은 이 주장에 따옴표만 붙인 사설을 게재했다. 당시 거론된 사건은 1990년대 말에 이미 엄밀한 수사를 거쳐 대법원의 확정 판결까지 난 일이었다. 필자와 관련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이고 새로운 증거가 제시된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언론이 대대적인 보도를 계속함에 따라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증명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의 몫이 됐다.

만일 어떤 사실(fact)이 제시됐으면 사실의 존재 여부를 가려 쉽게 의혹을 불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근거 없이 제기된 모함의 경우에는 짧은 시간 내에 시비를 가릴 방법이 없다. 동쪽에서 해가 뜨는 것을 놓고 ‘너와 관련 없다는 것을 증명하라’고 하는 것 같은 답답한 일이다. 대선이 끝난 뒤 필자는 검찰 조사까지 다시 받았지만 그 주장의 실체가 없음이 밝혀졌다.

언론의 신중하지 못한 보도로 큰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 예는 허다하다. 2004년 우리 사회를 뒤흔든 ‘만두 파동’의 시작도 식품의약품안전청과 경찰의 발표를 언론이 사실 확인 없이 그대로 보도하면서 비롯됐다. 종국에는 정부기관의 잘못된 발표와 과장된 보도의 합작품이었음이 밝혀졌을 뿐이다.

제기된 주장이나 의혹을 객관적으로 보도하는 일은 언론의 역할이자 의무이다. 그러나 책임 있는 언론이라면 의혹과 관련해 제시된 근거, 사실관계, 배경을 고려해 신중을 기하고 균형을 유지할 의무가 있다. 의혹을 과대 취급하고 주관적 표현을 가미하거나 의혹의 진위를 예단하고 사설이나 칼럼으로 여론을 주도하려는 행위는 보도의 본령을 넘어서는 일이다.

의혹에 대해 과장되고 예단된 보도가 많을수록 당연히 여론은 자극적인 결론과 중대한 법적 조치를 기대한다. 진실 여부에 관계없이 그런 드라마틱한 결말을 보지 못할 경우 여론은 ‘사실 아닌 사실’이 더 숨겨져 있다고 생각해 사법절차에 대한 냉소와 불신을 키운다. 이는 언론이 생명으로 삼아야 하는 ‘사실에 대한 존중’에 대해 범사회적인 훼손을 야기하는 후진적 결과를 가져온다.

1986년 미국에서 한인 교포가 교포 언론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한국의 대공 수사기관이 발표한 간첩단 사건에 연루자로 거명된 이 교포는 관련이 없다면서 교포 언론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 법원은 한국 정부의 발표가 있었더라도 사실과 달라 미국에 사는 사람의 명예를 훼손했을 경우 이를 보도한 미국 내 언론은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다른 나라 정부의 발표에 대해 사실 확인 의무를 다하지 않은 ‘부주의와 허위성(negligency and falsity)’이 인정되므로 미국 내 6개 한국계 신문은 각각 1만5000달러씩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판결이었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은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말로 민주사회에서의 언론의 중요성을 표현했다. 언론은 보통 입법 사법 행정부와 함께 제4부라고도 불린다. 언론이 국가권력을 구성하는 3부를 견제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을 지는 공공적인 기관이라는 의미이다.

우리 언론은 지난 오랜 세월 어려움 속에서도 독재 권력과 권위주의 정부에 대항하면서 국민의 애정과 신뢰를 쌓아 왔다. 이렇게 축적된 신뢰가 더 높은 수준으로 승화되기 위해서는 언론 스스로의 치열한 성찰이 더욱 요구되는 시점이다. 언론의 고민과 성찰을 기대해 본다.

정몽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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