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호 칼럼]반칙과 막말의 정치

  • 입력 2007년 1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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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적 관측의 소산일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세상이 조금씩 나아져 간다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되기를 희구하며 살아간다. 최근 역사를 보더라도 우리는 전후의 폐허를 딛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했다. 쓰레기통 속에서 장미를 피워 냉소적인 외부 관측자들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특히 6·25의 전시를 살아 본 세대에게 발전과 진보의 실감은 각별하다. 크게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정치 분야에서만은 머리가 갸우뚱해진다.

대선을 40여 일 앞둔 시점에서 그런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다. 우선 출발부터 반칙과 희극으로 얼룩졌다. 목에 힘주며 여당 지도부와 행정부를 드나들던 인사들이 스스로 만든 당을 뛰쳐나와 새 정당을 만들고 대통령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호강은 호강대로 하고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자세다. 모든 것이 대통령 탓이라는 뒷발질이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반칙이요 희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형식 논리로 보면 성인 남녀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당내 경선이라 하더라도 너도 나도 하고 나서는 것은 물색없다. ‘알아야 면장을 하지’란 속담이 있다. 시골 면장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모든 정당의 예비 후보를 합치면 만만치 않은 수다. 이것은 대통령 자리를 희화화(戱畵化)한다. 그런 뒤에 단일화랍시고 각본에 따라 손들고 치켜세우는 모습도 속 보이는 어릿광대짓이다.

품위 잃은 ‘왕의 남자들’

동네방네 다 아는데 혼자만 모른다는 속담도 있다. 10여 년간 한솥밥 먹으며 잘나가던 처지에 이번엔 가망 없다고 침 뱉고 뛰쳐나온 이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온 동네가 다 알았다. 당사자만 몰랐다. 어서 오라고 불러 놓고 나서 여긴 왜 왔느냐고 윽박지르는 것이나, 불러서 왔는데 이러기냐고 볼멘소리 하는 거나 피장파장이다. 아까운 인재가 불쏘시개 감으로 화상만 입었다고 혀 차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그런데 또 불쏘시개가 되고 싶은지 뒤늦게 또 한 사람의 반칙 후보자가 탄생할 모양이다. 동네방네 다 아는데 혼자만 모른다고 혀 차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지금까지의 대선 정국을 보면 정책 대결은 사실상 찾기 힘들다. 흠집 내기와 진위를 가늠할 수 없는 폭로 공세로 일관한다. 정치적 반칙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정책 대결이 실종하고 막말 경쟁이 벌어지는 현상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정적에 대한 인신공격은 우리만의 고유 관행도 아니고 또 있을 수 있는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의 문제다. 대통령 선거에 나선 상대방 후보를 히틀러니 패륜아니 하며 치고받는 행위는 아무래도 도가 지나치다.

히틀러가 어떤 인물인가? 1933년 1월 말에 총리가 된 그는 3월에 벌써 최초의 강제수용소를 설치했고 4월엔 비밀경찰 게슈타포를 설립했다. 집권 이전에 그는 이미 친위대와 나치스의 무장조직인 돌격대를 거느렸다. 유대인 학살은 누구나 알지만 정신장애인 7만 명과 집시 50만 명을 죽게 했다는 사실은 잘 모를 것이다. 1945년 3월에 내린 국내 시설 전면 파괴 명령은 너무 황당하고 기가 막혀 부하들도 복종하지 않았다.

패륜아란 인륜에 어긋나는 일을 저지르는 이를 가리킨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모에게 손찌검을 하거나 노부모를 유기하는 등 극한적인 경우에나 쓰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모욕적인 언사에 대한 응수이기는 하지만 예사로운 말은 아니다. ‘히틀러’나 ‘패륜아’가 대통령이 될 경우 어린 자녀에게 무어라고 설명해야 할 것인가? 폭군 밑의 국민은 폭군보다 더 폭군적이라고 루쉰(魯迅)은 말했다. 전 국민이 히틀러가 되고 패륜아가 될 것 아닌가?

상대 흠집내기 도 지나쳐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국민에게 신선한 감동을 준 것은 박근혜 후보의 경선결과 승복이었다. 담담한 표정과 차분하고 군더더기 없는 연설은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따지고 보면 박 후보의 승복은 정당인으로서 당연한 의무다. 당연한 의무가 크나큰 미덕으로 비치는 이유는 정치 현장이 상습적 반칙과 변칙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왕의 남자들’이여, 또 다음 차례 ‘왕의 남자들’이여, 여성에게 배우라. 정치 현장에 아량과 품위를 도입하라.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연세대 특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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