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윤평중]가짜들의 시대

  • 입력 2007년 7월 11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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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광주비엔날레’ 공동 예술감독으로 내정된 어느 교수의 경력 및 학력 위조 여부가 말썽이다. 본인은 국내에서 서울대 학부를 중퇴한 후 미국 예일대 미술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내와 미국 모두에서 기록상 전혀 확인이 되지 않는다. 놀라운 것은 그가 미술계의 ‘전문가’로서 그동안 사뭇 왕성한 활동을 벌여 왔다는 사실이다. 그랬기 때문에 30대 중반의 나이에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국제 비엔날레의 예술감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가짜 박사 소동은 그동안 심심치 않게 있었다. 위조일망정 학위증명서가 필요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써먹을 준비를 마친 사람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짓 학위의 범람은 일정한 사회적 수요를 반영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사회가 틀이 잡혀감에 따라 이런 적나라한 거짓은 이제 쉽게 허용되지 않는다. 검증 장치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합리적이고 성숙한 사회일수록 검증의 기제가 투명하다. 증명 과정이 철저하고 공정한 것은 물론이다.

결국 진짜를 사칭하는 가짜들은 언제 어디에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옥석을 구분하며, 가짜가 자라날 수 있는 여건을 최소화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큰 사기꾼일수록 통도 크고 멋들어지며 자신의 정체를 화려하게 포장하는 수법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비판적 검증은 민주주의 소금

여기서 우리는 2005년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아직도 그 여진이 가시지 않은 ‘황우석 사태’를 떠올리게 된다. 당시 정치권력, 자본, 언론, 민족주의적 정서 등의 합작에 의해 국가적 위업으로까지 칭송되던 황 박사팀의 줄기세포 연구는 이름 없는 젊은 과학자들의 문제 제기에 따라 거대한 ‘과학 사기극’으로 판명되었다. 연구 성과를 자랑하는 말과 겉모습은 휘황찬란했지만 그 내용은 허위와 부실의 덩어리인 것으로 드러났다.

거의 예정되어 있던 국가적 재앙과 망신이 소수 과학자와 언론인들의 검증 노력 덕분에 방지될 수 있었다. 전문적 합리성을 갖춘 비판 집단의 용기와 정화 능력이 우상숭배를 깨뜨렸던 것이다. 이 점, 황우석 사태의 아픔은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도약하는 값비싼 통과의례였다. 거짓과 허위는 그것을 허용하는 토양 위에서만 자라기 때문이다.

이처럼 과학과 학문의 세계에서는 진위를 가리는 엄격한 검증 과정이 존재한다. 이에 비해 온갖 이권과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정치 영역에서의 검증은 훨씬 복잡 미묘하다. 과학이 사실만을 검증의 기준으로 삼는 데 비해 정치의 지평에서는 사실과 가치판단이 어지럽게 뒤섞이기 때문이다. 칼 같은 선악이나 진위의 잣대를 정치에 그대로 도입하는 것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여전히 과학적 합리성은 정치적 판단과 사회적 이성의 주된 잣대일 수밖에 없다.

과학적 합리성이 이끄는 비판적 검증은 민주주의의 타락을 막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진짜와 가짜 정치인을 판별하는 시민들의 정치적 판단 능력은 현대 정치에서도 사활적 중요성을 지닌다. 집권 초기에 참여민주주의의 시늉을 잠깐 내는 듯하더니 거듭된 실정(失政)으로 민심이 떠나 버리자 참여정치를 아예 포기해 버린 자칭 ‘참여정부’의 행로를 보라. “당신들 가짜 아니냐”는 세상의 차가운 힐난에 대해 자기야말로 진짜라며 홀로 목청 높이는 것도 정체가 드러나 버린 가짜의 애처로운 모습을 닮았다. 대선을 앞두고 가열되고 있는 후보 검증 과정도 이런 맥락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세상 지탱하는 평범한 진짜들

흥미롭게도 학력 위조 여부로 시비의 초점이 된 앞의 교수는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메아리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겠지만 가짜가 오히려 득세하는 이 시대의 지침이 될 만한 말이다. 어제까지 정치 비평의 붓을 휘두르던 언론인이 오늘 특정 대선후보 진영으로 내달리고 고상한 사회평론을 일삼던 교수가 정치인의 숨은 참모 노릇을 마다하지 않을 때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불가피하다.

가짜가 활보하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다.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하는 이들이 진짜다. 결국 세상을 지탱하는 힘은 이런 평범한 진짜들에게서 나온다.

윤평중 객원논설위원·한신대 교수·사회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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