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등생 있어도 모범생은 없다

  • 입력 2007년 4월 14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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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와의 소통에는 능숙하지만 정작 사람과의 소통에는 서툰 아이가 늘고 있다. 공부는 잘하지만 정서는 메말라 좌절이나 분노 같은 감정이 일 때도 극단적인 형태로 해소하는 경우가 많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컴퓨터와의 소통에는 능숙하지만 정작 사람과의 소통에는 서툰 아이가 늘고 있다. 공부는 잘하지만 정서는 메말라 좌절이나 분노 같은 감정이 일 때도 극단적인 형태로 해소하는 경우가 많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지난해 서울의 한 특수목적고에 진학한 김모(17) 양은 중학교 때 영재로 불렸다. 그는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한 달에 한두 번꼴로 주말에만 집에 들른다. 겉으로 보기엔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미래를 위해 학업에 열중하는 모범생이다.

김 양은 최근 부모에게 “휴학하겠다”고 폭탄 선언을 했다. 집안이 발칵 뒤집힌 건 물론이다. 그는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 김 양은 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우울증에 빠진 것이다.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고 친구들과 거의 만나지 않는다.

김 양의 유일한 정서적 버팀목은 엄마다. 아빠와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아빠는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이에요.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누면 ‘예전에 항상 1등만 했다’는 말만 해요. 거짓말인 거 다 알고 있는데….”

그는 “고등학교에 들어와 더 심해진 공부 경쟁 때문에 정말 견디기 힘들다”면서 “집을 떠나 생활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집에서 풀고 싶지만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모범생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방정해 타(他)의 모범이 되어…’라는 학교의 모범상 문구에 걸맞은 학생이 예전만큼 많지 않다. 1등을 놓치지 않아 선망의 대상이 되더라도 결코 다른 학생의 모범이라고 할 수 없는 학생이 적지 않다.

1학년 때부터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은 중학교 2학년 이모(15) 군은 이른바 ‘모범생’이다. 이 군은 최근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리려다 엄마가 간발의 차이로 붙잡아 목숨을 건졌다.

엄마의 손에 이끌려 정신과를 찾은 이 군은 “정말 자살하려 했느냐”는 의사의 질문에 “진짜 죽고 싶었다”면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나는 1등을 해도 허탈하고 2등을 해도 슬프다. 1등 해 봤자 항상 해 왔던 것을 또 하는 거니까 허탈하고 2등을 하면 누군가에게 졌다는 사실 때문에 잠이 안 올 정도로 분하다. 차라리 세상에서 없어지면 괴로워할 일도 없을 것 같다.”

이 군을 진찰한 의사는 “겉보기엔 학교에서 잘 지내고 성적도 좋고 성격이 밝아 친구도 많은데 갑자기 이상행동을 하는 학생이 많다”면서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모범생이 사라지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들이 자랄 때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다. 한 자녀 가정이 많을 뿐만 아니라 형제가 있더라도 각자 바빠 외톨이가 된다. 대도시에선 방과 후 귀가해 봤자 곧바로 학원에 가야 하거나 맞벌이로 바쁜 부모가 집을 비워 혼자 지내야 한다.

마음누리 정신과 정찬호 원장은 “예전에는 주로 중학교 1, 2학년생이 방문을 걸어 잠갔는데 요즘은 초등학교 3, 4학년생만 돼도 방문을 걸어 잠그기 일쑤”라며 “아이가 이따금 부모에게 답답함을 하소연하더라도 핀잔만 듣는 경우가 많아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든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마음의 문을 열 대상을 찾기가 힘들다.

간섭하지 않는 컴퓨터와 친구가 되어 온라인 세계를 항해하기도 한다. 현실세계와 달리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어 감정이 거세된 로봇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초등학교 5학년생 아이를 둔 한 엄마는 “아이가 컴퓨터 게임을 하더니 갑자기 옆에 있는 동생을 마구 때리더라”면서 “‘동생이 아파하면 슬프지 않느냐’고 혼을 냈더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아이들은 스트레스가 쌓이면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소리를 질러 보기도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허전하다. 갈수록 짜증은 늘어나 늘 화가 나 있는 상태지만 다른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 소통에 좌절한 아이들은 심하면 우울감, 불안증에 빠지거나 폭력적인 행동에 의지하게 된다.

소아청소년 정신건강클리닉 ‘생각과 느낌’ 손성은 원장은 “아이들이 사랑과 인정을 받으며 자유롭고 싶다는 심리와 부모와 학교가 주는 과중한 기대치를 충족하며 학습 등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사이에 큰 괴리가 있어 항상 불안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의사 likeday@donga.com

우정열 기자 passi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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