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은령]꽃샘추위에 부쳐

  • 입력 2007년 3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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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여름, 단발머리 여중생이던 나와 친구들의 관심은 오로지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언’이었다. 1999년 7월 지구 멸망. 그냥 1999년도 아니고 7월까지 콕 짚은 단호함 때문에 도저히 비켜 갈 수 없는 운명으로 여겨지던 예언서를 읽으며 우리는 두렵고 슬프면서도 호기심으로 눈동자를 반짝였다.

“우리 나이 겨우 서른네 살밖에 안 되는데, 지구가 멸망하다니…. 결혼은 해야 하나? 아이들을 낳는다면 더 끔찍하잖아…”

그해 봄 수업 중이던 교문 바깥으로 대학생 시위대가 여러 차례 지나간 일 따위는 이미 관심 밖이었다. 2000년을 절대 맞지 못하리라는 ‘주문’이 그때 우리에겐 더 생생하고 중요한 현실이었다.

2월에는 4월처럼 따스하더니 정작 경칩도 지난 3월은 폭설에 수은주가 영하로 떨어졌다. 이렇다 할 꽃샘추위 없이 봄으로 갈 것 같다던 기상청의 예보는 이번에도 보기 좋게 빗나갔다. 슈퍼컴퓨터를 갖고도 왜 예보를 이 수준으로밖에 못하느냐는 비판은 이제 식상할 지경이다. 올해는 어떤 이변이 예상되느냐는 질문에 기상청 사람들은 “더는 이변이 없다. 이젠 이변이 일상”이라며 어깨를 으쓱한다. 왜? 뚜렷한 답을 발견할 수 없다면 지구온난화를 의심해야 한다. 변명만은 아니다. 짧아진 겨울, 거세지는 태풍, 봄에 퍼붓는 폭설…. 온난화는 이제 불가해한 온갖 기후현상의 ‘배후’로 지목된다.

지난 100년간 세계기온이 평균 0.74도 오르는 동안 한국의 평균온도는 1.5도 상승했다는 것이 기상청의 최근 보고다. 내 아이들이 사십대가 되는 30년 후에는 서울의 기온이 지금의 대구 기온이 될 것이라는 게 기상학자들의 예측이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꼽히는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와 기후변화의 상관관계를 컴퓨터도 없이 손과 머리로 계산해 낸 스웨덴 과학자 스반테 아레니우스(1859∼1927). 천재였지만 온난화의 결과에 대해서는 목가적인 상상력을 발휘했다. 지구가 따듯해지면 모국 스웨덴이 속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후손들은 햇빛을 좀 더 즐길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빙하가 녹는다’는 걱정은 21세기 우리들의 것이다.

이르게 온 2월의 따스한 봄이 하나도 반갑지 않았던 것은 지구온난화의 증거를 목격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꽃샘추위 예보가 어긋난 것에 대해서도 짜증이 나지 않았던 것은 속수무책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그런데 ‘최대한 온난화를 늦추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살아갈 시간을 버는’ 구체적인 대안을 찾아야 할 시간에 어긋난 ‘노스트라다무스의 대예언’이 기억나는 것은 왜일까. 아이들이 “우리가 어른이 되기 전에 지구가 멸망하면 어떻게 하죠?”라고 물어오면 엉뚱하다며 웃어넘기지 못하지만, 그래도 봄이 거슬러 다시 겨울로 가지는 않는 법이라는 믿음이 굳건해지는 것은….

30년 후면 꽃샘추위조차 귀해질지 모른다. 그때는 오는 봄을 막는 것으로 봄을 더 간절하게 했던 추위의 결핍이 그리워질 것이다.

‘…바람이 셀수록 허리는 곧아진다/뿌리는 언 땅 속에서 남몰래 자란다/햇볕과 함께 그림자를 겨울과 함께 봄을/하늘은 주셨으니’(이종욱 ‘꽃샘추위’ 중).

오늘 청계천에 내리는 봄볕은 따사롭다. 내주 초는 다시 추워진다 한다.

그렇게 봄은 온다.

정은령 사회부 차장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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