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녕]섀도캐비닛도 궁금하다

  • 입력 2007년 2월 11일 20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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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총선거로 정권을 결정하는 영국에서는 정권의 인계인수가 이삿짐을 옮기는 것만큼이나 간단하고 신속하다. 총선에서 패배한 현직 총리는 미리 싸둔 관저의 이삿짐을 선거결과가 나오는 즉시 사가(私家)로 옮기고 다음 날 아침 국왕을 찾아가 사의를 표명한다. 이어 승리한 정당의 당수가 국왕을 알현해 공식으로 총리 임명을 받으면 사실상 정권 교체는 끝난다.

이처럼 신속한 정권 이양이 가능한 것은 ‘섀도캐비닛(Shadow Cabinet)’이라 불리는 예비내각이 있기 때문이다. 야당은 평소 정부와 똑같은 형태의 예비내각을 구성해 운영한다. 부처별로 예비각료를 임명해 명단을 공개하고, 그들은 카운터파트인 현직 장관과 같은 문제를 다루면서 매주 의회에서 질의를 주고받거나 설전을 벌이기도 한다. 새 총리는 총선 다음 날 예비각료들을 중심으로 진짜 내각을 구성해 새 정권을 출범시킨다.

우리는 어떤지 4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2002년 12월 19일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뒤 20여 일이 경과한 이듬해 1월 10일에야 온오프라인으로 장관 후보 추천이 시작된다. 1월 22일 고건 씨가 새 국무총리로 공식 지명되지만 새 내각의 진용은 대통령 취임 이틀 후인 2월 27일 발표된다. 그나마 교육부총리는 인선에 난항을 겪다 3월 6일에야 결정된다. 대통령 취임에도 불구하고 총리 지명자에 대한 국회 임명동의안이 처리되지 않아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총리가 대신 자택에서 결재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새 정부의 이른바 ‘12대 국정과제’는 2월 21일 확정되지만 이를 추진할 태스크포스(TF)는 4월에 구성되고 이때부터 로드맵 작성에 들어간다. 정권은 출범했는데 국정과제의 구체적 계획이 세워지지 않았으니 국정 공백이 따로 없다. 당시 임채정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은 “정리된 방법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길을 내며 산을 올라가야 했다”고 토로했다.

단 하루 만에 정권 교체가 이뤄지지만 빈틈이 없는 영국과 2개월이나 준비하고도 엉성하기 짝이 없는 한국. 비단 노 정권만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경우 얼마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정권을 맡게 되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대통령 되겠다는 사람들이 오직 선거에만 매달릴 뿐, 장차 나라 살림을 맡으면 누구와 어떻게 운영할지를 생각하지 않는 근시안(近視眼) 때문에 빚어지는 일이다.

언제까지나 이런 구태를 되풀이할 수는 없다. 각 정당의 경선을 통과한 대통령후보는 집권하면 누구에게 어느 자리를 맡길 것인지, 무엇을 국정과제로 정해 어떻게 추진할지를 구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분야별로 단수가 부담스러우면 복수로라도 예비내각을 구성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런 작업은 사실 지금부터 구상해도 빠르지 않다. 사람을 고르는 일만큼 중요한 선거운동이 없다. 유권자는 각 후보의 예비내각까지 감안해 지지 후보를 결정할 수 있고, 예비각료들에 대한 사전 검증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면 ‘내각 인사의 실패’ 가능성을 줄일 수도 있다. 예비각료들로 초기 내각의 진용을 짜면 국정도 원활하게 굴러갈 것이다.

엉겁결에 대통령에 당선되고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정권을 맡는다면 당사자도, 국민도 피곤해진다. 이제는 치밀하게 준비하는 사람에게 나라를 맡겨야 한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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