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원재]새 돈이 ‘복덩이’가 되려면

  • 입력 2007년 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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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대국 일본’의 경제정책을 다루는 당국자들이 딱해 보였던 적이 있다. 일본의 새 돈이 나온 2004년 11월에 그랬다.

일본은행은 1000엔, 5000엔, 1만 엔권의 등장인물을 교체하거나 디자인을 바꿔 새 지폐를 선보였다. 20년 만에 신권을 찍은 공식 목적은 지폐 위조 방지.

신권이 발행될 즈음 재무성 일각에서 색다른 해석이 흘러나왔다. 새 돈이 장기불황 탈출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는 기대였다.

논리는 단순 명쾌했다. 우선 새 지폐 발행으로 은행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와 각종 자동판매기를 바꿔야 한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관련 기기 발주에 따른 직접효과로 7000억 엔이라는 구체적 수치까지 제시했다.

저금리에 실망해 가정의 장롱 속에 잠긴 돈이 신권 교환을 위해 금융권에 유입되면 소비와 투자를 부추길 것이라는 예상도 했다.

심리 이론까지 가세했다. 빳빳한 새 지폐를 보면 기분이 좋아져 돈을 쓸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처음엔 솔깃했지만 따져 볼수록 군색했다. 무엇보다 새 돈과 경기회복 사이의 상관관계가 납득되지 않았다. 그 정도로 효과가 크다면 불황을 거치는 동안 새 돈을 찍어도 여러 번 찍었어야 했다.

곰곰이 생각하니 이해가 될 듯도 했다. 불황 극복에 대한 염원이 얼마나 절실하기에 일본 최고의 엘리트들이 비과학적인 신화에 매달릴까 하는 연민의 감정이 생겨났다. 그들은 경제주체들의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워 경기회복의 미미한 불씨라도 살리고 싶었을 터였다.

한국의 당국자들은 그런 점에서 어른스럽다. 1만 원과 1000원짜리 새 지폐가 22일 나오지만 신권 발행으로 경기가 좋아진다는 식의 논리는 펴지 않는다. 상황이 아무리 힘들어도 경제 문제는 경제 논리로 풀어야 한다는 신념 때문일 것이다.

일본 관료들이 검증되지도 않은 새 돈의 효과에 집착한 것은 관(官)이 장기불황을 초래한 주범이라는 원죄(原罪) 탓이 크다.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의 거품 관리에 실패해 ‘잃어버린 10년’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국민의 따가운 눈총이 못내 부담스러웠다.

한국 당국자들이 일본 동업자의 전철을 밟을까 걱정스럽다. 시중에 풀렸다는 400조∼500조 원의 부동자금과 부동산 가격 폭등, 저성장의 고착화는 일본을 10년 넘게 괴롭힌 망령과 너무 비슷하다.

일본 경제는 보란 듯이 부활했다. 하지만 불황 탈출의 공신으로 새 돈을 꼽는 전문가는 없다.

그들이 막연한 미신에 사로잡혀 손을 놓은 것은 아니다. 겉으로는 분위기 조성용 멘트를 던지면서도 안에서는 공공부문 개혁과 규제 완화를 통해 민간 활력을 키우는 정책을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갔다.

근거 없는 낙관론은 위험하지만 새해 벽두에 경제주체들의 의욕을 살리는 덕담까지 매도할 필요는 없다. 보름 뒤 새 지폐를 한 움큼 들고 “한국 경제가 다시 비상하는 모습을 지켜볼 복덩이”라고 선언해도 괜찮다. 물론 그 전제는 부동산 시장의 연착륙과 투자 활성화, 경제체질 강화에 대한 복안을 갖춘 다음이다.

이제 와서 보니 일본의 당국자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박원재 특집팀 차장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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