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원재]성형업과 제조업, 생존게임

  • 입력 2006년 10월 25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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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특파원 시절 일본인 친구와 종종 언쟁을 벌이곤 했다. 대화는 늘 평행선을 달렸다. 일본의 역사 왜곡이나 독도 영유권 문제로 입씨름을 벌였다면 차라리 허탈하지는 않았을 터. 한국의 유별난 성형 열기가 ‘분쟁’의 소지를 제공했다.

그는 한국 여성의 외모가 평균적으로 일본 여성보다 앞선다는 데 동의했다. 그러면서 “한국 젊은 여성 중 절반 이상은 성형수술을 받았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여주인공 대다수는 성형외과가 만들어낸 인조 미인이라고도 했다. “그런 현상은 극히 일부에 국한된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수긍하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성형 열기를 확인하고 싶어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성형 타운’을 찾았다. 빽빽하게 들어선 성형외과 간판을 목격한 뒤 괜한 타박을 했다고 자책했다. 이웃 나라의 평범한 시민이 ‘한국 미인=성형 미인’이라는 선입관을 갖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국의 성형 붐은 동아시아 3국을 잇는 공통의 화제다. 강남의 성형외과엔 일본인 손님에 이어 2, 3년 전부터 중국인 고객의 발길이 부쩍 늘었다.

올봄 중국 동북부 지방에 있는 시의 시장 부인이 강남의 한 성형외과를 방문했다. 얼굴 흉터를 제거한 뒤 내친김에 성형수술까지 받고 흡족해하며 귀국했다고 한다.

이 병원에선 매월 3, 4명의 중국인 환자가 얼굴을 고친다. 한국의 성형수술 단가는 중국 대도시보다 5∼10배 비싼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 주요 고객은 부유층이나 고위 공직자의 부인과 딸이다.

한국의 성형외과가 동아시아를 사실상 석권한 비결은 1970, 80년대 한국 제조업의 성공 신화와 절묘하게 닮았다.

우선 탄탄한 내수시장의 덕을 많이 봤다. 한국의 성형수술법은 수요가 왕성한 국내에서 병원 간 치열한 경쟁과 소비자들의 까다로운 선택을 거치며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현대자동차가 국산차를 애용한 소비자들의 후원에 힘입어 세계 10대 메이커의 반열에 오른 과정과 비슷하다.

제조업 최고경영자(CEO)들은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각오로 해외시장 개척에 공을 들였다. 성형외과도 한류 열풍을 적절히 활용해 해외 마케팅을 펼쳤다.

근면과 성실로 무장한 우수 인력은 제조업 성공의 주역이다. 한국 성형의 명성도 의대생들이 성형외과에 몰리는 세태와 무관치 않다.

한국 제조업은 기술 선진국 일본과 맹렬히 추격 중인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고전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현재 3.8년인 한국과 중국의 제조업 기술 격차가 2015년엔 1∼2년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성형외과의 성공담은 제조업 부활의 해법을 놓고 고민 중인 당국자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돌파구는 내수 기반 확대와 인력 양성, 해외 진출로 뚫어야 한다.

성형 자체에 대한 가치판단을 접는다면 ‘수출용 의료서비스업’으로서 성형업의 번성을 굳이 탓할 생각은 없다.

걱정스러운 것은 제조업 몰락의 언저리에서 성형외과만이 대(對)중국 우위를 지키는 상황이다. 중국의 하청 공장으로 전락해 유한(有閑) 여성의 얼굴을 고쳐 주고 연명하는 시나리오는 자존심 차원에서도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돈 잘 버는 성형외과 개업의도 제조업 경쟁력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박원재 특집팀 차장 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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